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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과학계] 여성 의료계 선구자, 현덕신 선생님(1896~1962)

  • 등록일2022.07.28
  • 3303

의료계 선구자·독립운동가 현덕신 선생님을 기리다

: 이화의료원, 보구녀관 설립 135주년 맞아 전시, 출간 등 다양한 기념사업 펼쳐


올해는 ‘보구녀관(普救女館)’이 설립 13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여성병원인 #보구녀관 은 볼드윈진료소, 동대문 부인병원을 거쳐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으로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화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김점동)을 비롯해 최초의 간호사 이그레이스와 김마르다 등 여성 의료인을 배출하며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근대 의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이화DNA의 주인공은 이화가 배출한 또 한 분의 선구자, 현덕신 선생님(1896~1962)인데요! 현덕신 선생님은 이화학당 졸업 후 일본 동경여자의과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1920년대 #동대문부인병원 에서 근무하며 박에스더 선생님의 뒤를 이어 여성을 위한 의료를 이어가셨습니다. 또한 호남지역 최초의 여의사, 광주 최초 여성 전문병원인 현덕신의원 개원 등 여성 의료인으로서 선도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지난 2020년에는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에 추서되며 독립운동가로서의 공훈을 인정받기도 했는데요. 조선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현덕신 선생님의 이야기, 바로 시작합니다!


현덕신 선생님(출처 : 국가보훈처)

현덕신 선생님(출처 : 국가보훈처)


현덕신 선생님은 황해도 해주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현덕신 선생님은 15세에 서울로 유학 와 이화학당 중등과를 졸업한 후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박에스더 선생님이 조선 최초의 여의사로서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열기는 했지만, 여성이 의료인으로 활동하거나 혜택을 받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기고문 ‘여의사가 되기까지의 고심기’에서 현덕신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조선 여자들을 위해 도움이 될까. 조선 사회에 유익한 인물이 될까’ 생각하다가, 병이 들어 죽을지언정 남자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하는 조선 여자들을 위해 봉사적 생활을 하는 것이 거룩한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결정”(<신가정>. 1935) 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요. 


조선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되기 위한 굳은 결심으로 당시 여성이 의사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던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로의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지만, 당연히 유학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돈이 없어 배를 주리기 일쑤였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 고생도 했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해 경무국 1급 요시찰 인물이 되면서 유학 생활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덕신 선생님은 1919년 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선언에 황신덕, 김마리아 선생님 등 이화학당 동창들과 함께 참여했으며, 1920년 3월 1일 동경 히비야공원에서 벌어진 ‘재동경조선학생독립만세’ 사건으로 검속되었습니다. 힘겨운 유학 생활 중에도 현덕신 선생님은 “네가 어디 출신이며, 지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언젠가 떳떳하게 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 우리 민족의 존재를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오빠 현석칠 목사의 말을 가슴 속에 새기며 동경여의전 병원 담요를 몰래 조선 학생들에게 가져다 주고, 모금에 동참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습니다. 


조선에서는 4번째 여의사 현덕신 양(출처 : 동아일보 1921.11.22) | 최원순, 현덕신 부부(출처 : 국가보훈처)

 조선에서는 4번째 여의사 현덕신 양(출처 : 동아일보 1921.11.22) | 최원순, 현덕신 부부(출처 : 국가보훈처)


또한 동경여의전 졸업 후 귀국해서도 2․8독립선언을 함께한 동아일보 기자 최원순 선생님과 결혼해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2020년 독립유공자 건국포장에 추서되었습니다.


귀국 후 현덕신 선생님은 당시 최고의 여성 전문 병원이던 동대문 부인병원 소아과와 산부인과에 합류했는데요. 현덕신 선생님은 동대문 부인병원에서 근무하며 의술을 연마하고, 간호부들에게 간호학과 생리위생학을 가르치는 한편, 기독교 여자청년회 회장이 되어 강연에도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평생 단발을 고수하신 현덕신 선생님 (출처 : 남도일보)

평생 단발을 고수하신 현덕신 선생님 (출처 : 남도일보)


동대문 부인병원 시절 현덕신 선생님은 머리카락을 손질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발을 단행합니다. 여성들의 단발에 거부감이 강했던 때라 신문에 실릴 정도로 주목을 받는 일이었지만, 현덕신 선생님은 “밤에 자다가 갑자기 왕진을 하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할 뿐 아니라 급한 환자나 방금 해산하려는 산모가 있는 때에는 일분일초를 다투게 됩니다. 그럼으로 저는 무엇보다 그런 때에 시간을 덜 들게 하자는 것이 단발한 첫 목적이라고 하겠고, 또는 머리를 깍고 보매 생각하던 것보다도 더욱 가뜬하고 편리하외다.”(조선일보 1926.7.4)라고 답하며 평생 단발머리를 고수할 만큼 의료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출처: 광주일보)

(출처: 광주일보)


현덕신 선생님은 평생을 바쳐 의료인으로서, 신지식인이자 운동가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의 소명을 다했습니다.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최원순 선생님의 건강이 악화되어 남편의 고향인 광주로 내려가서도 여성을 위한 의료 사업을 이어가고자 현덕신의원을 개업했습니다. 광주 지역의 첫 여성 병원을 열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당시 지역 유지들은 병원 부지와 건축비, 의료장비 구입비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선생님은 근우회, YWCA 등의 활동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정신을 고취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개화 및 기독교 전도 사업에도 주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8년 광주지역에 신생 유치원을 설립하고 1951년 유치원 교사 양성을 위한 신생 보육학교를 개교하여 유아 교육에 앞장서는 등 지역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한편 이화의료원은 설립 135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3일(월)부터 7월 17일(일)까지 현덕신 선생님의 손자인 최영훈 화백 초대전을 개최했습니다. 이대서울병원 아트큐브와 웰니스아트존에는 화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화려한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1000호 대작을 비롯해 모두 4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환자와 의료진에게 힐링을 선사했습니다. 최영훈 화백은 현덕신 선생님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전시회 종료 후 출품작 ‘봄빛’을 이대서울병원에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유경하 이화여자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은 “조선 여성들의 삶을 구하기 위한 거룩한 사명을 되새기며 묵묵히 의학과 독립운동의 길을 걸으신 현덕신 선생님은 오늘날 이화의료원의 주춧돌을 놓으신 분”이라며 “현덕신 선생님의 진취적인 도전과 헌신의 삶을 ‘이화의 정신’으로 이어받아 계승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이화의료원은 ‘이화의료원 135년사 편찬위원회 TF’를 구성해 국내외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연구하고 있으며, 올해 ‘사진으로 보는 이화의료원 135년사(가칭)’와 ‘현덕신 의사 전기(가칭)’ 등 책을 편찬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화의료원이 최초를 넘어 최고의 의료기관으로 성장하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헌신이 뒷받침되었습니다. 조선까지 와서 평생을 헌신한 의료 선교사 선생님과 조선 여성들을 위한 여의사가 되기 위해 도전을 멈추지 않은 박에스더, 현덕신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이화가 ‘봄빛’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참조] 

이화의료원 블로그 ‘잊지 말아야 할 이름, 현덕신: 조선 여성을 위해 의사가 된 독립운동가’ 2021 

이동순, 「여성운동가 현덕신 연구」, 『문화와 융합』 2020, vol.42, no.1, 통권 65호 pp. 575-595 

최은경,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의사들의 활동-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 졸업 4인을 중심으로」,『코기토』 2016, vol.80, 통권 80호 pp. 287-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