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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숙 동문(화학, 57년 졸)

  • 등록일2015.03.19
  • 4106

이화에 반가운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오랜 시간 이화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명숙 동문이 또다시 학교발전을 염원하는 기부금을 보낸다는 것이다. 모교에서 받은 혜택이 큰 만큼, 모교를 도울 수 있어 진심으로 기쁘다는 정명숙 동문. 그녀의 이화를 향한 마음은 누구보다 특별하다. 부산 보수동 천막교사 시절인 1953년 이화여대 전체 수석으로 입학해 대학원 진학, 조교 근무를 거쳐 1987년에 교수로 퇴직하기까지 이화에 몸담았던 시간만 34년이다. ‘이화는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신 특별한 은혜’라고 말하는 정명숙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우리 이화가 더욱더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명숙


이북의 작은 마을에서 이화로 오기까지의 여정

정명숙 동문은 평안북도의 용암포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일을 따라 중국 심양, 신경, 단동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다시 북한 신의주로 건너온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공산 정권이 들어서고 지주와 자본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자 가족들은 월남을 계획하여 황해도 해주로 이사했다. 언젠가 남한으로 가게 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던 정 동문은, 남한에서 월북한 친구들에게 수소문하여 서울에서 가장 좋은 학교가 어디인지 물었고, 그때부터 ‘이화’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아버지를 따라 가족과 함께 월남하리라는 애초 계획과 달리, 열여덟의 당찬 소녀는 친구와 함께 먼저 월남을 감행했다. “남한에 가게 됐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엄마를 조르고 [바른말 고운말을 사용합시다.] 서울행 군용 트럭을 타게 됐어요. 우리 가족보다 먼저 서울에 가 계신 외삼촌댁에 가면 되지 않냐고 엄마를 설득한 거죠. 우여곡절 끝에 온 가족이 월남하기까지 위험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무사히 지나게 하시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만나게 하신 이 여정 전체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였어요.” 이 인터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정 동문이 책 한 권을 들고 왔다.


‘나의 울타리가 되신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

지난 2000년, 6·25 50주년을 기념하여 낸 자서전이었다. 책 제목은 ‘나의 울타리가 되신 하나님’. 한 탈북 여성의 기자회견을 통해 북한의 인권 현실이 온 국민의 가슴을 울렸던 그 즈음, ‘북한 형무소 우물에는 사람 시체를 김장하듯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는 그 여성의 증언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북한에 남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우리 가족을 이렇게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죠. 그렇지만 북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떨칠 수가 없어요.” 어느새 정 동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였다.

“북녘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비하면 우리 젊은이들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음에도 감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비관하는 건 아닌지. 요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는 걸 보면 너무나 안타까워요. 어려움이 있으면 밝은 날도 오게 마련이니까 하나님께 간구했으면 좋겠어요. 기도의 힘은 정말 크니까요.”

정명숙 동문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간구했고, 실제로 특별한 은혜를 입기도 했다. 1960년대 코리아헤럴드 기자로 근무하며 고려대에서 강의하던 남편은 자금난을 겪고 있는 후배에게서 ‘시사영어사’라는 작은 잡지사를 인수했다. 오늘날 그 잡지사가 ‘YBM시사영어사’라는 큰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기도와 은혜가 함께 했다.

이화가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길 숙원하며 용감하고 꿈이 많았던 정명숙 동문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스웨터 팔꿈치가 다 닳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 덕에 이화여대에 수석으로 입학했죠.” 

어렸을 때부터 수학과 과학에 남다른 흥미와 재능을 보였던 정 동문은 한국의 퀴리부인을 꿈꾸며 ‘화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노벨상을 타 보겠다는 야무진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모교의 교수가 됐으니 이만하면 큰 성취이지 않을까. 보수동 천막 교사에서 한 학기를 보내고 신촌 캠퍼스로 복귀했지만 당시 실험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실험 장치를 조교들이 직접 다 만들던 때였다. 실험실에 분젠 버너가 처음 들어왔을 때와 계단의 빈 공간을 이용해서 약창고를 만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고. 후에 종합과학관 건립에도 많은 후원을 했던 정 동문은 모교의 발전, 특히 자연과학의 발전을 언제나 간절히소원한다. “우리 이화가 세계적으로 훌륭한 대학으로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이화 졸업생들이 UN사무총장도 되고, 세계적인 역할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 기부자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