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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이덕희 하와이이민연구소장(사회학과·63졸) N

  • 등록일2025.07.01
  • 35

120년 한인 이민사를 발굴하고 연구해 온 이덕희 하와이한인이민연구소장이 2025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선정됐습니다. 이화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하와이 도시계획가를 거쳐 이민사 연구자가 되기까지, 그리고 하와이 한인 여성들의 숨겨진 독립운동사를 세상에 알리기까지의 여정을 만나보았습니다. 



자랑스러운 이화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소감을 간단하게 듣고 싶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해서 연락을 받고 많이 놀랐죠. 제일 먼저 어머니가 떠올랐어요. 1931년 메이퀸이셨거든요. 아직은 신촌으로 캠퍼스가 이전하기 전이었는데, 지금의 신촌 부지 넓은 들에서 열린 첫 번째 메이퀸 행사였다고 해요.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참 기뻐하셨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 상이 저에게 과분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하와이에서 도시계획가로 직장 생활을 오래 하다가 자연스럽게 한인 이민자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저 이민자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갔을 뿐인데 역사 연구자로 보이게 되어 조금 민망하기도 미안하기도 합니다. 


1960년대 유학생으로 UC버클리와 USC에서 공부하시고도시계획가로서의 여정을 먼저 시작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저는 이화에서 사회학과 2회를 졸업하고 UC버클리에서 도시사회학을 공부했어요. 그 당시 한국이 농촌 사회에서 도시 사회로 변화되던 시기라 그러한 과정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학위를 마치고 귀국 후 하게 될 강의를 준비하면서 책을 보다가 'City Planning'이란 단어를 난생 처음 접하게 됐어요. 도시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계획에 따라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저한테는 굉장히 충격적일 만큼 놀라웠고, 즉시 귀국 계획을 바꿔서 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도시계획 석사과정을 밟게 됐죠. 당시 가난한 흑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인 와츠(Watts)에서 일어난 폭동(1965)을 계기로 도시계획 분야에 전면적인 개혁이 일어났고 채용도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어요. 마침 하와이 도시계획가 채용에 지원해 호놀룰루 시청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부서에서 최초로 정식 학위를 받은 첫 외국인 여성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하와이라는 곳이 참 특별했어요. 다양한 민족들이 어울려 살면서도 각자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곳이거든요. 도시계획 일을 하며 정치인들, 다른 이민 커뮤니티와도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습니다. 


호놀룰루 시 공무원으로 활동하시던 시절과 한인이민사 연구자로서의 삶은 상당히 대조적으로 느껴집니다그 전환의 계기가 무엇이었는지요

일본계나 중국계 이민자들이 100주년, 150주년 행사를 활발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순간 '우리 한인들은 뭐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인 사회는 자료도 부족하고 연구도 없는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1993년 하와이 이민 90주년을 계기로 기념사업위원회에서 처음으로 '그들의 발자취'라는 책을 냈고, 이후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본격적인 자료 수집을 시작했습니다. 그 책을 계기로 후손들의 자료 제보가 이어졌고요. 사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는데, 제가 그 시작을 하게 된 것뿐이에요. 앞으로 이 연구를 이어갈 후배가 없다는 게 요즘 걱정이 되긴 합니다. 


여성 이민자들의 역할에 대해 특히 조명하셨습니다연구한 내용 중 가장 널리 알리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요?

처음부터 여성 이민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한 것은 아니었고, 여러 자료를 모으고 생활사를 들여다보니 우리 여성 이민자들이 독립운동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사실 하와이의 첫 이민자들은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이었어요. 대부분이 남성이었죠. 이들의 사진 한 장만 보고 평생의 운명을 걸고 하와이에 온 이른바 ‘사진 신부’들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진은 현실과 많이 달랐다고 해요. 신랑감으로 젊은 남자의 사진을 보고 왔는데 실제 와보니 노인이었다거나 생계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았어요. 대부분의 여성들은 가장 역할을 하면서 자녀를 키우고, 행상을 하며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놓기까지 했어요. 함께 김치를 담가서 팔고, 떡을 팔고, 군복을 직접 만들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자금을 모았거든요. 자기 돈도 냈지만, 조직을 결성해서 여성들이 노동을 통해 직접 돈을 벌었다는 게 아주 중요해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1919년 대한부인구제회에서 만든 독립선언서 포스터예요. 모금을 위해 독립선언서를 컬러 포스터로 만들었어요. 무궁화와 태극기로 장식하고 33인 명단, 임시정부 헌장까지 다 넣었어요. 독립선언서가 컬러 포스터 형태로 만들어진 유일한 자료입니다. 국민보사에서 조판하고 호놀룰루 영자신문사에서 컬러 인쇄해서 만든 건데, 내가 찾아내기 전까지는 독립기념관에서도 그냥 "미주에서 발간된 독립선언서" 정도로만 알고 있었어요. 이런 구체적인 여성들의 활동이야말로 진짜 독립운동이었던 거죠.


하와이는 작은 대한민국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당시 한인 사회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하와이 한인사회는 숫자는 적었지만 결속력은 엄청났어요. 한 번도 인구가 전체의 2%를 넘지 않았지만, 교육, 독립운동, 커뮤니티 활동이 정말 활발했어요. 단체도 많았고, 모임도 활발했고, 무엇보다 교회를 중심으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움직였어요.

일본이나 중국 이민자 사회에는 여성 주도 단체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부인회, 구제회 같은 조직이 활발했어요. 이게 가능했던 건, 기독교 교회 중심의 리더십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일본 여성 이민자들과 큰 차이점이죠. 일본은 불교나 신토 중심이라 단체 행동이 어렵지만, 한국 여성들은 교회에서 회의, 토론, 실행력 등을 체득했거든요. 하와이에서 한인 커뮤니티를 이끌어간 주체는 사실상 여성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수많은 발굴과 연구 작업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나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한인 2세들과 친해지면서 한 분을 알게됐는데, 그분이 "엄마가 녹음을 남겨놓은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카세트테이프 12-13개였는데, 처음에는 집안 이야기가 많아 언니가 반대한다며 딱 1개만 주더라고요, 그런데 테이프를 들어보니까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회 상황과 단체 활동을 자세히 설명한, 그야말로 민족문화적 자서전이었어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 동생이 언니를 설득해서 결국 모든 테이프를 받게 됐는데, 놀랍게도 녹음 테이프뿐 아니라 그 내용을 노트에 기록한 것까지 방대한 자료를 다 보관하고 계셨어요.

나중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신 한국학중앙연구원 이배용 원장님이 오셨을 때 "하와이 대학에 있으면 한국 교수들이 접근하기 어려우니까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이러한 요청을 계기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천연희 컬렉션’이 구축됐고, 그걸 바탕으로 『하와이 사진신부 천연희의 이야기』라는 책도 나왔어요. 원문과 현대어 번역을 함께 실어서 아주 두꺼운 책이 됐죠. 



1931년 메이퀸이셨던 어머니 최신덕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와 이화의 학창시절에 대한 추억도 듣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평양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이화여전을 다니셨고, 졸업 후에는 김활란 박사의 권유로 인천 영화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셨어요. 해방 이후에는 서울로 내려와 YWCA 활동을 시작하셨고, 이사장까지 역임하셨죠.

그 시절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성 교육과 사회활동이 가능했던 몇 안 되는 길이었죠. 어머니도 그 안에서 활동하며 삶을 개척해 나가셨고요. 어머니 이야기를 지금 생각하면, 그 시대 여성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어요.

그때 저는 몰랐죠. '또 옛날 얘기야?' 하고 넘겼는데, 지금은 그때 이야기가 얼마나 귀중한지 절감하고 있어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하게 된 데에도 어머니의 삶이 큰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활동은 결국 이화에서 시작된 여성 교육의 힘이었던 것 같아요.

저 역시 이화에서 다양한 추억이 있지만 한국 사회학의 대모이신 이이효재 선생님과의 추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이이효재 선생님이 체계적인 대규모 사회조사를 시작하셨을 때 제가 ‘한국 농촌가족 조사’를 함께 다녔습니다. 당시에는 여관이 없던 때라 밤이 되면 어느 집에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를 지면서 조사를 다녔는데, 어느 집을 가도 때가 새까맣게 탄 이불을 내놓았어요. 선생님은 직접 만든 깨끗한 슬리핑백을 들고 다니셨던 기억도 나네요. 



마지막으로 이화의 후배들을 위해 격려나 도전의 메시지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공에 너무 얽매이지 말라는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싶어요. 저는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도시계획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이민사 연구를 하고 있잖아요. 전공은 출발선일 뿐, 인생은 얼마든지 다른 길로도 펼쳐질 수 있어요. 

그리고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 정말 중요합니다. 인간관계를 경시하면 안 돼요. 저는 하와이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시작했지만 인간관계를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일과 연구가 이어졌고, 지금도 그 인맥들이 제 일을 돕고 있어요. 어떤 인연도 헛되지 않으니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후배들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