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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스토리

익명의 편지

  • 등록일2020.02.06
  • 4783
익명

평범한 30대 직장인이라고 밝힌 익명의 기부자, 까미유피사로장학금 600만원 약정

 

2018년 1월경, 대외협력처 장학기금 담당자에게 e-메일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올해 35세의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밝힌 한 동문이 익명을 요청하며, 매달 50만원씩 입금해 까미유피사로장학금 600만원을 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호기심 많은 담당자는 궁금했습니다. 젊은 나이에 어떤 계기로 장학금을 기부하는지, 장학금명은 왜 ‘까미유피사로’인지... 그래서 다시 메일을 보내 그녀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후원을 막연하게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실천에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계기로 이렇게 후원을 하시게 되었는지 참 궁금합니다.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만 10년이 넘었네요. 지치도록 전략을 짜고 야근을 하고, 협업 파트너들한테 읍소도 하고, 하루종일 “답이 여의치 않아 죄송하다”를 반복하거나, 조직생활을 힘들어하는 후배들을 달래면서 월급날 하루, 휴~하고 긴숨을 내뱉는 그런 평범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범이라고 하고 싶지만 평범이라는 말조차 상대적이니, 그저 복이 많은 직장인이라고 소개하겠습니다.

 

고백부터하자면 내놓기 부끄러운 종잇장 같이 얇은 신앙이 있는데, 늘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기 삼아 저를 통해 의를 이루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봅니다. 늘 기대보다 큰 방향으로 저를 이끌고 축복해 주신 삶에 대한 감사는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내놓는 것은 미력하고 하잘 것 없으나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끌고 이루시리라는 믿음 하나에 의지하며 발을 내딛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후원약정서 ‘예우 동의’란을 두고, 하나님이 단지 저를 통해 하시는 일에 제가 예우를 받아도 될까를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결국 도서관 ID 예우의 유혹을 걷지 못하고 (창피하네요...) 명단에 이름만 지우고 예우를 해달라 타협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는 무척 세속적인 인간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돈이 저의 생활과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상기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살면서 일을 하고 일상을 살아 나가는데 재화에 대한 욕구는 끊임 없이, 한도 없이 불어납니다. 이를 어떻게 벌고 어떻게 쓸 것인지를 스스로 확정하고 주도하지 않으면 물질을 가장 쉽고 편리한 가치의 척도로 착각하고, 사람도 돈으로 보거나, 돈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신념을 위협 받는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삶을 살 수도 있겠다는 각성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다행히도 무참한 계기없이 평온한 삶에서 깨닫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막연하게 그려왔던 후배를 위한 장학금을 티끌처럼 시작할 수 있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감격스럽고, 고민하던 장학금의 기준을 유연하게 받아준 모교의 장학 시스템도 참으로 다행스럽다는 마음이 듭니다.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있는 가장 평범한 이들이, 지금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지만 굉장히 훌륭한 잠재력을 가진 이들이 성실하고, 단단하게 성장하고, 좋은 영향력을 발휘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세부 장학 기준을 왜 그렇게 정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이전에 메일에서 말씀 드렸던 듯 하여 여기에는 줄이겠습니다.)

 

 

장학금 명칭이 카미유 피사로.. 라고 하면 프랑스 화가를 말하는 건지요? 장학금 명칭을 이렇게 지으신 사연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화가 이름, 맞습니다. 이름은 ‘불리는 것’이라 매우 중요한데, 좋은 뜻을 함축한 이름을 지으려고 보니 오히려 사고가 막히더군요. 여느 후배님이 훗날 ‘유일하게 학창시절에 받아본 장학금이 OOO 장학금이야’라고 이야기 할때 창피한 이름만은 아니어야겠다, 그러려면 장학금 이름만 듣고 다른 사람들이 섣불리 무슨 장학금인지 유추하기 어려운 것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매년 제가 얼마를 마련하고, 후원을 할지가 바뀔 수 있어서 1년 단위로 약정서를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금액이 늘어날 수 있기를 바라야겠지만) 좋아하는 많은 예술가 중에 이름을 고르면 아이디어가 고갈되지는 않겠더군요. ‘화가 이름’으로 장학금 명칭을 지은 특별한 이유는 없는 셈이 되네요.

 

그럼 왜 그럼 굳이 카미유 피사로냐고 물으신다면,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드러나는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어느 인생에나 끈질기게 찾아오는 나태와 권태와 무력감을 성실함 하나로 평생을 살아낸 사람이자 스스로 가꾼 재능을 통해 거목이 될 후배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은 인물이라 더 좋아합니다. 지금 당장은 다음 학기 학비를 마련하기 어려워 휴학을 고민하고 있거나, 만반의 준비를 하는 동기들에 비해 아직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고 잘하는지 조차 확신이 없어 남모를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나, 나는 잘난 사람들을 상대하기엔 너무 부족하다는 패배의식에 허우적 거리는, 푸르딩딩한 풋콩 후배들 중에서 피사로 같은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삶으로 이끄는 여유, 성실,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깨우치는 가장 큰 방법은 그것들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화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합니다.

  

외부와 내부의 편견에 대항하고, 코너에 몰려도 인격을 내버리지 않으며, 가짜가 아닌 진짜로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가치를, 부드러움이 세련된 강인함이 될 수 있음을 깨우치는 첫 과정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물리적인 시련과 뭐 하나 녹록하지 않는 경쟁의 연속 뿐만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무기력감, 지루함과 나태함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삶을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 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유일한 소명이라고 합니다. 신은 우리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라’라고 하지 ‘잘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잘하는’ 것은 ‘할 수 있다면야 좋은’ 옵션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억지스럽게 남에게 잘보이려는 삶, 경쟁에서 짓밟아 이기는 삶만이 칭송 받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타인이 설령 나를 함부로 대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타인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타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할지는 온전히 나의 선택이고, 나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화에서 ‘평균 이상’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유독 많아 보이고, 그에 비해 자신은 평범을 넘어 초라하다고 느껴진다면 ‘겉으로 보이는 조건만 과시할 수 있다’는 프레임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않은지 내면을 살펴보기를 권합니다. 평범해 보이기만 하는 이도 내면의 보석을 발견하면 기대를 뛰어 넘는 삶을 채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후배님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왜곡된 잣대로 낮추어보는 미련한 착시를 걷어내고 단단하고 여유로워지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