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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욱 총장 매경 인터뷰 - 이화의 125년 전통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

  • 작성처
  • 등록일2011.01.31
  • 16983
매일경제신문은 1월 29일자 '매경이 만난 사람' 지면에 본교 김선욱 총장과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 관련 기사 보기(매일경제 2011년 1월 29일자)


"여성지위 사회적인식 바꾸기 힘들땐
프랑스처럼 법률제도 먼저 개선해야"


“사시합격자 여풍 거세지만 여성대법관 한명뿐인 한국, 이화 로스쿨이 바꿔나갈 것…
서양 선교사들이 베풀었듯,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제3세계 여성에게 알리겠다”

1973년 11월은 서슬 퍼런 유신독재가 옥죄이던 때였다.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함성이 전국에 메아리쳤고,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다. 당시 이화여대생 4000명은 가두 행진에 이어 대규모 철야기도회를 연다. 독재 공포정치 척결을 요구하며 전원이 단식투쟁 돌입에 서명했다. 이 소식은 전국에서 대학생들 시위가 타오르게 하는 기폭제 구실을 했다.

이날 가두시위 맨 앞에서 김옥길 총장(8대)이 학생들을 보호했다. 김 총장은 경찰 감시를 피해 학생회 간부들을 총장공관에 며칠간 숨겨주기까지 했다.

쫓기는 학생들에게 스승은 마지막 피신처였고 한없는 보호자였다.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한 3학년 법대생은 이렇게 읊조린다. "가장 소중한 이화의 가치가 스승님 모습에 있네요. 저희도 닮고 싶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때 그 학생은 닮고 싶었던 스승처럼 이화여대 총장이 됐다. 바로 현재 이화여대를 이끌고 있는 김선욱 제14대 총장(59)이다.

이화학당은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 미국에서 온 여성 선교사인 스크랜턴이 단 한 명의 여자아이를 학생으로 문을 열었다. 1886년 작은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시작된 역사는 이제 아름드리 나무로 결실을 봤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우리는 이 여아들이 외국 사람처럼 생활이나 의복이 변하길 원치 않는다.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던 꿈이 이뤄졌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최고의 나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이화의 125년 전통은 그 자체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 이화의 비전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 이화의 가치는 계속 유지될까. 지난해 선임 이후 지금까지 인터뷰를 고사해왔던 김 총장이 매일경제를 만나 비전을 풀어놓았다. 지난 27일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 본관 파이퍼홀 1층 집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70년 넘은 건물에 5평 남짓한 소박한 집무실은 이화의 전통이 묻어나는 현장이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인터뷰 내내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강조했다.

-건학 125년을 맞은 소회는.
▶이화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역사이자 여성 지위 향상의 역사다. 1886년 건립 이래 194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4년제 대학교 공식 인가를 받았다. 1945년 의과대학, 1996년 공과대학과 법과대학 설치, 2008년 로스쿨 등 전통적으로 여성 진출이 힘들었던 장벽들을 허물며 새 길을 개척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 머물 때가 아니다. 이화의 유산과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해 제3세계에서 또 다른 이화가 나타나길 기대한다.

-이화의 가치를 세계로 더 넓히는 작업인가.
▶빈곤과 가난의 나라인 한국에 몇 명의 서양 여성선교사가 자신을 희생하고 뿌린 씨가 바로 이화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줘야 한다. 이화의 경험과 가치는 세계 곳곳에 있는 취약한 지위의 사람들에게 소중하게 활용될 수 있다. 제3세계 여성들을 위한 학위취득 지원 프로그램 EGPP(Ewha Global Partnership Program)와 함께 올해엔 제3세계 공익 부문 여성활동가에 대한 교육인 EGEP(Ewha Global Women Empowerment Program)를 시행할 계획이다. 취약계층 여성 인재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지급하는 `세대간 장학금` 제도를 시행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 여성경제활동 참가율을 보면 우리나라는 53.9%, 전체 27위로 최하위 수준이다. 특히 고학력(대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OECD 평균 82.4%에도 훨씬 못미치는 62.6%로 고위직으로 올라갈수록 취약하다. 전체 공무원 중 여성공무원 비율은 41%로 높아졌지만 4급 이상 비율은 6.8%, 특히 고위공무원단은 3%도 안 된다. 출산이나 육아 등으로 여성의 지속적인 경제활동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뜻한다. 이화여대는 역대 여성장관의 50%, 여성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배출하고 여성들에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개척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고 제도도 개선하는 등 앞으로도 더 해야 할일이 많다.

-사회적인 인식이 변하려면 꽤 오래 걸릴 텐데.
▶여성의 사회 진출을 막는 여러 요소들은 사실 전통이나 문화라는 형식으로 포장되고 감춰져 있는 것이 많다. 실제 사회적인 인식을 바꾸는 것은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개인적으론 이럴 경우 제도를 먼저 바꿔서 사회의 인식이 따라 변하도록 하는 방법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모든 상장기업에 대해 여성 임원이 40% 이상을 차지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또 유럽의 많은 국가가 육아휴가를 여성만 사용하지 않고 남성도 육아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휴가의 일정 비율을 배우자가 의무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도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 노르웨이에서 대통령을 여성이 이어가며 10년 가까이 했던 당시 일화가 있다. 5세 된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남자도 대통령이 될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는 것이다. 인식은 현재 환경에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성 독자들이 힘을 얻을 만한 좋은 사례를 말해 달라.
▶체코 출신의 이방인이자 3자녀의 어머니로 39세까지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전 국무장관은 딸이 다니던 학교의 기금 모집과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미국 최초의 여성 UN 대사를 거쳐 미국 역사상 최초의 국무장관이 됐다. 올브라이트는 미국 명문여대인 웨슬리대학 출신으로 학창시절에 배양한 도전의식과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이 큰 힘이 됐다고 밝힌 바 있다. 물론 성별을 이유로 한 차별이 엄격히 금지돼 있는 미국사회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9년 명예 이화인으로 본교를 방문했던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역시 웨슬리대 출신이다.

-여성 인력이 특정 분야에만 편중된 것도 한계로 지적되는데.
▶이른바 성별직종분리 현상으로 비서 간호사 유치원교사 등은 98% 이상이 여성으로 채워지고 있고 사회문제화하기도 한다.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여성 법조인 양성시스템에서 찾아보자.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이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예를 찾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이대가 1996년 세계 최초의 여자법과대학을 설립한 이후 이대 출신 법조인의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이대는 대학별로 따져 현재 사법고시 합격자 배출 순위가 5~6위권이다. 이 결과 여성의 사법시험 합격자 비율이 전체의 40%를 넘어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진입이 공정하다면 남녀 평등 차원의 성취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이제 법조인 양성 시스템이 사법고시에서 로스쿨로 변경되고 있다. 이대 로스쿨 역시 여성에게 불리한 장벽을 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이어갈 것이고 사회 전반의 누적적인 차별을 시정하는 데 거점이 될 것이다. 세계 유일의 로스쿨로서 각국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역사성을 존중하는 질문을 많이 해온다. 법조계의 과제는 아직 많다. 임용이 공정한 판ㆍ검사는 여성이 절반에 가까와져 가는데 대형 로펌은 여성 변호사가 20%도 안 된다는 점을 보라. 여성 대법관이 한 명밖에 없는 현실에서 이대 로스쿨의 의미가 더욱 커졌고 할 일이 많다.

-이대의 교수나 직원들은 여성 인력으로서 좋은 환경을 갖고 있는가.
▶실제로 이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여성이 일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지 못했다. 예를 들어 보육센터도 변변치 않다. 기업은 고용보험에서 지원을 받고, 국공립대는 정부에서 지원을 받는데 사립학교는 사각지대여서 지원도 없고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 나도 총장이 되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여성의 생애주기를 고려한 육아지원센터와 보육센터를 잘 만들어 다른 직장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범사례를 하나 만들 계획이다. 교수들에겐 `stop tenure clock` 제도 등 출산이나 육아가 연구에 장애로 작용하는 사태를 방지하는 방안을 강구 중이다. 경력이 단절된 고학력 여성의 사회 재진입을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도 맞춤형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융합연구 육성에 관심이 많으신데.
▶생명과학, 의대, 약대, 심리학이 융합된 뇌인지 분야에 큰 관심을 갖고 투자하려고 한다. 1999년 BK21 1단계를 시작하기 위해 분자생명과학부를 신설하면서 본격적인 학제 간 연구가 시작됐다. 뇌인지 분야 외에도 바이오신약 등 생명과학을 기반으로 하는 분야와 디자인, 인문학, 공학이 결합한 융합 분야에 큰 관심을 두고 투자할 계획이다.


■ She is…

헌정사상 최초 여성법제처장 역임
"총학생회장 당선이 인생 터닝포인트"


김선욱 총장이 꼽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대학 3학년 때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이 된 것이다.

법대생으로 법관의 꿈을 안고 사법고시 준비를 막 시작한 때였다. 고교(명동 계성여고) 때 학생회장을 지냈던 김 총장은 대학에선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고 공부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법대 수석합격을 하는 바람에 자동으로 과대표를 하게 됐다.

3학년이 되자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법대 출신 선배들이 연이어 총학생회장을 하는 바람에 법대에서 후임이 나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했다. 그의 리더십을 아는 선후배와 친구들이 총학생회장에 나서길 계속 권유했다. 엄중한 시대적 상황을 볼 때 총학생회장과 개인적 성취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했다. 고민하던 김 총장은 결국 학생회장에 나섰다.

"사법고시는 졸업하고 나서도 할 수 있지만, 시대적 사명은 지금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결국 이 결정으로 김 총장은 평생 사법시험장은 근처에도 못 가봤다. 김 총장은 치열한 시대에 총학생회장을 했지만 온건한 그의 성품을 결코 양보하진 않았다. 선후배와 동료 4000여 명을 설득해 가장 평화적인 방법으로 비장한 결의를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철야기도회를 몇 번이고 치러냈다. 당시 사범대 학생회장으로 총학생회 부회장을 맡았던 40년지기 친구 강순화 씨(59) 는 "김 총장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이미 학생 때부터 `차기 총장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김 총장은 올곧지만 온화한 성격이어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고 항상 든든하고 의리있는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지금도 본인이 총장실에 오래 머물면 비서들도 눈치를 볼까 업무시간 후에는 파일을 공관으로 가지고 가서 늦은 밤까지 살펴본다. 처음 강의를 맡게 된 제자들에게는 "학생들은 그 집안에서는 가장 소중한 딸이니 항상 한 명 한 명을 귀히 여기며 가르쳐라"고 조언한다.

이렇게 온화하지만 근성이 있는 성격이다. 이것이 그를 저명한 법학자로 만들게 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 법무부에 근무할 때 일이다. 사무실엔 법무부에 파견된 검사, 김 총장 같은 연구직, 일반 행정직원들이 함께 근무했다. 파견 검사들은 쏟아지는 업무에 매일 밤을 새기 일쑤였지만 연구직과 행정직은 연구만 하고 매일 정시 칼퇴근을 하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런데 김 총장은 "검사들은 매일 밤을 새는데 내가 일찍 퇴근하는 것이 그렇게 기분이 나쁘더라"고 회고했다.

1980년 초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장학생으로 독일로 유학을 떠나 1988년 독일 콘스탄츠 대학에서 행정법 전공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당시 남성들이 주를 이룬 행정법 학계에 여성이 진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경험한 김 총장은 스스로 그리고 주변 많은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여성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이 분야 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현재 김 총장은 `한국독일동문네트워크(ADeko)` 이사장을 맡고 있다. 2005년 1월부터 2007년 4월까지는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 법제처장(장관급)을 지냈다. 당시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며 국민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법률 중 어려운 한자어나 일본식 용어를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총학생회장 때 김옥길 당시 총장이 보여준 스승의 모습을 매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는 "이화의 가치는 스승과 제자 간 끝없는 신뢰"라며 "우리 때는 독재의 탄압에서 학생만이 자유로워 그 비장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요즘은 우리 대학생들이 마음껏 세계로 나아가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시대여서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에 할 수 있는 것들과 무궁한 가능성이 저렇게 펼쳐져 있는데 자꾸 옛날식 학생운동만 고집하는 제자들은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고 덧붙였다. 무상급식도 "재원이 충분하다면 하면 좋지만, 재원이 충분하지 않다면 당연히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등 중립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매일경제(2011년 1월 29일자)
[대담 = 윤구현 사회부장 / 김선걸 기자 / 사진 = 이충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