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검색 열기
통합검색
모바일 메뉴 열기

이화여자대학교

통합검색
nav bar
 
Ewha University

이화뉴스

이화학당 윤후정 이사장 인터뷰(1~6회)

  • 작성처
  • 등록일2007.05.08
  • 14953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로 우리나라 헌법에 양성평등의 개념을 도입하는 등 한국 여성의 공적 평등권 확보에 앞장서온 이화학당 윤후정 이사장의 인터뷰가 여성신문에 6회에 걸쳐 시리즈로 소개된다. 1회부터 6회의 인터뷰 내용은 아래 링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1) 남성법에 여성 목소리 담아(여성신문 926호)
- (2) '합리적인 차별' 개념 도입, 여성시각 가족법 틀 마련(927호)
- (3) 마침내 ‘남녀차별금지법’이 탄생했다(928호)
- (4) 한국을 세계 여성학의 메카로(929호)
- (5) '이화' 통해 여성교육의 비전 넓혀(930호)
- (6) 일평생 선지자적 비전·끊임없는 열정(931호)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여성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로 헌법에 양성평등 조항을 삽입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법여성학을 일궈온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은 여성 법학자와 법조인의 큰 스승이다. 4월 한달간 윤후정 명예총장을 네차례 인터뷰하고, 관련 참고문헌을 참조해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여성사’ 두번째 시리즈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 윤후정’을 조명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1)

‘남성’법에 ‘여성’목소리 담아
호주제 폐지·민법 개정안 근거 마련도
정치권 유혹 뿌리치고 후학양성 심혈


▲ 봄빛이 완연한 이화학당 뜰에서의 윤후정 명예총장. 여성의 사적 생활 평등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그는 20여년 후 대통령직속 초대 여성특별위원장으로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여성의 공적 생활에서의 평등권을 확보해냄으로써 한국의 법 질서와 법 문화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을 꿈꾸는 힐러리 로댐 클린턴의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를 처음 봤을 때 ‘자서전 제목으로는 좀 과장된 것 아닌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린 적이 있다. 그런데 그를 만나 논리정연하게 펼쳐진 삶의 행보를 들으면 ‘이것이 바로 역사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방식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대선배들이 진통 끝에 만들어놓은 길을 걸어가는 오늘의 우리에 대해 문득 멈춰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헌법에 가족·혼인생활 평등권 삽입

윤후정(75) 이화여대 명예총장 및 이화학당 이사장. 그는 우리나라 첫 여성 헌법학자로 이화여대 첫 직선 총장(1990)이며 초대 한국여성학회장과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장관급)으로 기록된다. 그뿐인가. 1975년 학과장 시절 법학과가 창설된 지 25년 만에 첫 사시 합격생을 배출했고, 이후 그 합격생은 대한민국 첫 여성 헌법재판관(전효숙)이라는 새 역사를 만들어냈다. 지난해까지 312명의 사시 합격생을 배출한 토대와 원동력을 만들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 봄빛이 완연한 이화학당
뜰에서의 윤후정 명예총장.
여성의 사적 생활 평등권을
헌법에 보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그는 20여년 후
대통령직속 초대 여성특별
위원장으로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을 통해 여성의 공적
생활에서의 평등권을 확보
해냄으로써 한국의 법 질서
와 법 문화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그러나 ‘이화’라는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 그의 족적은 따로 있다. 바로 법대 교수 시절이던 1980년 제8차 개헌 때 가족·혼인 생활에서의 평등 조항을 삽입하고,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초대 위원장이던 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제정을 주도해 국회에서 기어코 통과시킨 것이다. 특히 현행 헌법 제36조 제1항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한다’는 조항의 초안을 작성한 것은 후에 2005년 2월3일 헌법재판소의 호주제에 대한 ‘헌법 불합치’ 판정으로 이어졌고, 결국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의 헌법적 근거가 됐다. 그 역사적 의미는 한 시대의 흐름과 사회에 일대 변혁을 가한 ‘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사람의 생활은 가족생활과 공공생활에 따르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자녀, 부부, 호주제 등 가족관계와 재산 상속관계 등 사생활을 규정한 것이 가족법인데, 기존 가족법은 여성을 은연중 불평등한 존재로 취급하며 여성에게 불평등했다. 그러나 개헌 때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서의 양성평등 조항을 집어넣음으로써 사적 생활의 근간이 되는 질서를 바꾸게 된 것이다.

이후 99년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사회생활, 공공생활에서의 양성평등을 확보했다. 이 두 축을 중심으로 사적 생활과 공공생활 양쪽에서 여성을 차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 가장 큰 보람이다.”

‘커서 여성을 위해 일하고,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던 당찬 소녀의 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법질서는 그 자신의 설명대로 “헌법학을 했기에” 가능했다. 기존 가족법의 모순을 이론적으로 차근차근 따져볼 수 있는 논리의 틀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좀더 근본적으론 누가 굳이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깨우쳐간 여성의식이 전문지식과 결합해 만들어낸 행복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식민지 체험으로 여성의식 자라

윤후정 명예총장은 서울 출신의 모친(조사라)과 인천 출신의 부친(윤태현)이 1925년쯤 함경남도로 이주, 안변군 근처 신고산 농촌 마을에서 1932년 5월7일에 태어났다. 여섯 남매 중 다섯째였다. 그가 기억하는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따사롭다. 화목하고, 특히 남자니 여자니 따지는 차별이란 걸 몰랐다. 궁핍한 시절, 참외 같은 과일이나 생선 등 귀한 먹을거리를 사오더라도 아들 딸 구별 없이 평등히 나누어 먹곤 했다. “어머님은 인자하시고 헌신적이며 말이 없으셨고, 힘들고 분주한 중에도 교회 일엔 빠지는 법이 없을 정도로 신앙심이 퍽 깊으셨다. 아버님은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농부셨다”고 회상하는 순간엔 이 대학자의 눈에도 천진난만한 온기가 어리곤 한다.

그의 여성의식의 씨앗은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 여성들의 고단한 삶과 함께 일제 식민지 시대에 겪은 결핍감에서 싹튼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7시까지 함께 농사일을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두 사람의 모습은 딴판이었다. 어머니는 돌아오자마자 밤 11시까지 저녁밥 지으랴 빨래와 다림질하랴, 또 다음날 식사 준비하랴 정신없이 일하다가 밤 11시나 돼서야 “아이구 다리야, 허리야” 끙끙거리며 잠이 들곤 했다. 반면, 아버지는 저녁 식사 이후엔 10시30분 정도까지 마실을 가 동네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교류를 갖고 오곤 했다. 가만히 보니 이웃 여성들의 삶도 어머니의 삶과 대동소이했다. 그는 어린 마음에도 왜 여성은 이렇게 사는 것일까 싶어 “어머니, 왜 여자들은 모두 이렇게 살아요?”라고 묻곤 했고, 어머니는 “여자는 그러기 마련이란다”는 답변을 하곤 했다. 그래서 그는 일찌감치 “그렇게 살 거면 혼인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선언을 해버렸다. 더구나 족보에 딸들 이름은 하나도 없다는 걸 발견한 것은 충격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일본어가 아닌 우리말을 쓰는 학생들이 야단맞고, 국기를 밖에 내걸지도, 집에 가지고 있지도 못하는 상황에 대해 아버지께 물을라치면 아버지는 “우리가 나라를 빼앗겨서”란 답변을 하곤 했다. 그게 하도 속상해 “왜 빼앗겨요?” 되물으면 “우리가 약하고 힘 없어서”란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어린 그에게 “약하고 힘 없으면 권리를 빼앗긴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자리잡았다. 아버지의 말을 곱씹을수록 그는 여성들 삶의 아픔과 서러움,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아픔과 서러움의 색깔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그렇게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아갔다. 그러면서 ‘힘 있는 나라’ ‘뭔가를 빼앗기지 않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의 꿈을 가지게 됐다.

이화여고 시절 학교 강연에서 처음 접한 이후 6·25로 부산에 피난 와 짐을 풀고 경동교회의 문을 연 고 강원용 목사(‘크리스찬 아카데미’ 설립자)와의 만남은 그의 삶의 물줄기를 바꿔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산 피난 시절 강 목사에게 대학 진로상담을 하며 “후에 여성문제 해결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은데 전공을 뭘 택했으면 좋겠느냐”며 정치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속내를 비친 그에게 강 목사는 단호히 권했다. “여성들에겐 아직은 금단의 열매처럼 접근하기 힘들지만 자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법학을 전공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게다가 초등학교 때 도지사상을 타는 등 여고 때까지 쭉 성적이 뛰어났던 그에게 서울대 법대가 아닌, 생긴 지 1년밖에 안된 이대 법대를 강력히 권했다. 지금은 강 목사의 탁월한 혜안에서 나온 권유라 생각하지만 당시로선 무척 난감한 자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마감시간 5분을 남겨둔 오후 4시55분에 이대 법학과에 지원서를 넣었다. 어떠한 문제에 대한 원인을 밝혀냄으로써 해결하는 것은 철학, 이를 실행하는 것은 정치학이라는 그의 논리에 강 목사가 “문제 해결은 실질적으론 법학이 더 강하게 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내세운 논리에 설득당한 것이다.

대학 시절, 그의 표정은 늘 심각하고 진지했다. 생활문제를 해결하랴 학업을 하랴, 학우들과 살갑게 사귈 심적 물리적 여유가 없었던 데다가 사법고시에 대한 미련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의재판 시나리오를 짜서 진두지휘하며 자신은 변호사 역을 맡아 뒤로 물러앉아 학우들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55년 법대 4학년일 때 벌써 ‘이화’에 여성의 법적 지위에 관한 소논문을 기고했다. 당시 국회에서 논의 중이던 친족상속법 초안에 일제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그가 과연 사시를 통한 법조인의 길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었을까.

“사실 고시공부를 끔찍이 하고 싶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에 들어가니 선생님이 연구조교를 시켜주셨는데, 당시엔 이 연구조교가 사무조교 일도 겸했다. 업무가 많아 밤 10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근무 시간 중인 낮에 이번엔 도서관 이 편에, 다음엔 도서관 저 편에, 이렇게 살살 숨어서 고시공부를 하곤 했다. 이걸 각 과를 돌아다니던 교무처 차장에게 들켰고, 당시 김옥길 학무과장에게 이 사실이 보고돼 불려가기도 했다. 그때 난 사시에 합격해 판사를 경험한 후에 잠깐 변호사 활동을 하다 나라를 위해 정계에 나가겠다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대학원 생활에 우선 충실해야 한다고 이렇게 저렇게 나를 달래셨고, 난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고시공부를 완전히 단념할 순 없었다. 생애 처음으로 선생님께 거짓말을 한 셈이다.“ 이후 도서관에서의 고시공부를 또 들키자 김옥길 선생은 그를 헬렌관 앞 숲속으로 불러내 면담했다. 이런 저런 격론 끝에 김옥길 선생은 “넌 이 학교에 남아야 해”라고 결론지었고, 그는 결국 법조인의 길을 포기했다. 그는 “50, 60년대엔 여성 한두명이 정계에 들어간다고 해서 무슨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때는 아니었다. 오히려 만신창이가 됐을 수도 있다”며 “결국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후학들을 잘 길러 우수한 여성인력을 만들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줬기에 보람 있었다”고 회고한다.

유학중 제출한 석사논문 심사과정중 박사논문으로 승격

그는 도미해 62년 루이스빌대학에서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학한 후 예일대 법대에서 법학석사 과정을 거쳐 72년 노스웨스턴대학 법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노스웨스턴대 3년 반 동안 한번 집중하면 8시간이고 10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공부에 빠져들어갔다. “아침에 빵 한 조각 먹고 시작하면 금방 또 아침이 되었을 정도”였다. 논문을 쓸 때는 어찌나 집중했던지 블루진 엉덩이 부분이 닳아 떨어지다 못해 의자로 삼았던 흰색 소파에 블루진 물감이 배어들었다.

노스웨스턴대학 법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완료해 심사를 받는 과정 중에 뜻밖의 말을 듣게 된다. 지도교수인 앤서니 다마토 교수가 그의 논문이 아주 우수해 우수논문상에 추천하려고 하던 차에 논문 심사에 참여했던 네이선슨이란 미국 행정법·헌법의 최고 권위자 중 한 사람도 논문이 아주 우수하니 조금 더 보충하면 박사학위 논문으로 받아줄 수 있다는 제안을 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법대에서도 같은 학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모두 이수케 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고, 더구나 로스쿨을 졸업하지 않은 사람은 받아주는 일조차 드물었기에 이 제안은 그에게 굉장한 행운이었다.

이처럼 성공적으로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니, 당시 남녀 불문하고 법학박사 학위자가 참으로 드문 때였기에 정치권의 유혹이 쏟아졌다. 그러나 대학원 시절 헬렌관 앞 숲속에서의 김옥길 선생의 단호한 충고 덕에 그는 학교에서 후학을 기르자는 생각을 굳히고 흔들리지 않았다.

- 2007년 4월 20일 여성신문 926호 이은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