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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이화 사랑, 3대 이화 가족을 만나다

  • 등록일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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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화여자대학교! 이처럼 오랜 역사 때문인지 우리는 엄마와 딸이 모두 이화를 졸업한, 이른바 모녀화연을 종종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소개해드릴 가족은 단순히 엄마와 딸로 칭하기에는 많이 특별한데요. 바로 할머니, 어머니를 이어 손녀까지 3대에 걸쳐 이화와 인연을 맺고 있는 가족입니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어머니, 거기에 손녀 두 명까지 총 다섯 명이 모두 이화를 졸업했거나 현재 재학 중이라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가족을 이화투데이가 만나고 왔습니다. 6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이화와의 인연, 과연 어떤 이야기들이 가득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대 이화 가족’의 이야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Q. 3대에 걸쳐 이화와 인연을 맺고 계신 분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먼저 학번 등 각자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영자 동문(1대, 외할머니): 우리 때는 학번이라는 말을 안 썼어요. 대신 '몇 년도 입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우리 딸이 대학에 갈 때쯤 되니까 학번이라는 말을 쓰더라고요. 저는 1960년도 입학생이고, 유아교육을 전공한 이영자입니다.
심양식 동문(1대, 친할머니): 저는 1957년도에 학교에 입학해서 1961년도에 졸업했어요. 학번이 없고 그냥 61년도 졸업생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익숙해요. 문리대학 소속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심양식입니다.
채명진 동문(2대): 88학번 인문대학 사학과 채명진입니다.
김지윤 동문(3대): 14학번 영어영문학과 김지윤입니다. 스크랜튼학부 사회과학 이니셔티브 트랙을 복수전공했고, 연계전공 중 하나인 동아시아학을 부전공했습니다.
김지연 벗(3대): 17학번 중어중문학과 김지연입니다. 현재 경영학과 공공리더십과정의를 복수전공하고 있습니다.

Q. 학교를 다녔던 시기도, 전공도 다르신데요. 다른 가족들, 그리고 이화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본인 학과만의 특징이 있을까요?
심양식 동문: 당시 문리대학 안에는 영어영문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과, 사회학과 등이 있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는 특히 지역을 막론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학과였어요. 서울에서 쭉 나고 자란 학생들은 지방 학생을 만날 기회가 많이 없는데, 우리 과에는 지방 학생들도 많이 왔기 때문에 다 같이 어우러지기가 좋은 분위기였습니다. 각 지방 사투리도 많이 배우고, 교수님들도 좋은 분들이 많으셨고,  분위기가 참 좋았어요. 당시 국어국문학과를 포함한 문리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은 주로 장학관이나 학교 선생님이 됐어요.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교생 실습을 나가면 교사가 될 수 있었거든요.
* 사진 : 60년대 이화 재학 시절의 추억
이영자 동문: 사범대학을 졸업하면 중등교육, 초등교육, #유아교육 등 각 분야별로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줬어요. 그때는 사범대학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서울대학교, 수도여자사범대학(현 세종대학교), 그리고 이화여대 정도였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사범대학 소속 학생들이다 보니 친구들 대부분 정교사 자격증으로 학교에 취직을 했어요. 학생들은 대부분 원만하고 착한 성격을 갖고 있었고요. ‘둥글둥글’하다는 말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채명진 동문: 지금 와서 돌이켜봐도 저는 학교생활을 굉장히 재밌게 했던 것 같아요. 특히 사학과 는 봄과 가을에 답사를 갔거든요. 4년 내내 1년에 두 번씩 답사를 다니면서 친구들이랑 같이 숙박하고, 여행도 다니다 보니까 다른 과에 비해 친구들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과 분위기도 정말 좋았고요. 그런 경험들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인생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또한 역사를 공부하는 건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다양한 해석을 배우는 거잖아요. 여러 가지 다양한 해석을 배우는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을 기를 수 있었어요. 정치나 경제 등 세상에 수많은 학문이 있지만 역사는 특정 학문에 국한되지 않고 항상 전반적인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에, 사학을 공부하면서 한 사건의 이면에는 뭐가 있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사고가 잡히지 않았나 싶어요.

김지윤 동문: 일단 영어영문학과에는 우수한 동기들이 많이 모여 있어서, 학창시절 자체는 치열했지만 그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복수전공으로 스크랜튼학부의 트랙 중 사회과학이니셔티브트랙 을 이수했는데요. 아무래도 제 주전공이 인문대 소속이기 때문에 다른 분야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에 선택한 것인데, 스크랜튼학부를 복수전공하면 스크랜튼대학에서 열리는 철학, 글쓰기, 논리학 등의 필수 전공과 본인이 원하는 타 전공 수업 들을 조금씩 선택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스크랜튼학부를 복수전공하면서 ‘학문적인 학문’을 배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또 저는 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해서 그 경험을 연결 지어 대학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기도 했어요. 중어중문학을 선택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민 끝에 동아시아학이라는 조금 더 인문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이 가능한 연계전공을 선택했습니다.

김지연 벗: 저는 이화여대에 정시모집통합선발생으로 입학했기 때문에 학부 단위로 입학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었기 때문에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했고요. 중문과를 포함한 인문대가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7+1 프로그램인데요. 우리 학교 중문과는 상해 복단대와 교류를 맺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한 그걸 다녀오면 동기들과도 더 친해질 수 있고요. 경영학은 사회를 이해하는 시각을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복수전공으로 선택했어요. 그리고 공공리더십과정의는 아직 생소하신 분들도 있으시겠지만, 우리 학교 법학과가 없어지면서 일종의 로스쿨 관련 트랙으로 생긴 복수전공입니다. 흔히 ‘공리정’이라고 줄여 부르는데, 공리정 수업을 들으면 우리나라의 법 체제에 대해 다양하게 배울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로스쿨 지망생들이 많기 때문에 치열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재밌고 적성에 잘 맞는다고 느끼며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Q. 지금 재학 중인 따님분들 말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캠퍼스에 방문하는 게 오랜만일 것 같습니다. 소감이 어떠신가요?
심양식 동문: 저희는 그래도 이화에 자주 와요. 당장 5월에 학교 안에서 동창회도 하기로 했을 정도로요. 꼭 그것 때문이 아니더라도 옛 교정이 그립다는 생각에 캠퍼스를 자주 방문하곤 했어요. 지윤이랑 지연이 고모도 이대를 나왔기 때문에 그럴 기회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이영자 동문: 저는 졸업을 한 뒤에도 계속 학교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학교가 생각날 때마다 종종 방문했어요. 동창회도 하고 학교 식당에 와서 점심도 먹고요. 그리고 제 딸이 입학할 때 입학원서를 내러 오고, 손녀들 입학식에도 오다 보니 다른 사람들처럼 졸업 후에도 학교를 멀리하고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상대적으로 학교에 방문할 기회가 많았죠.
채명진 동문: 저도 딸들을 모두 이대에 보내다 보니 입학설명회도 오고,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행사도 있어서 학교에 올 기회는 많았던 것 같아요. 저희가 모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는데, 이화의 교정은 방문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요. 이제는 거의 집처럼 편하기도 하고요.

Q. 그렇다면 옛날과 비교했을 때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심양식 동문: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그때랑 지금이랑 분위기가 달라서 낯선 느낌이 들어 아쉬울 때가 있어요. 저는 특히 당시 대운동장에 대한 추억이 많거든요. 그때는 교문을 들어서면 대운동장에서 체육 수업하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고, 모든 과가 모여서 체육대회도 했었어요. 운동장에 있는 스탠드를 꽉 메우고 응원하는 재미도 있었고요. 저는 육상을 잘 해서 육상 대회나 계주 선수로도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에 대운동장을 볼 때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상대적으로 덜해서 아쉽죠.
이영자 동문: 저는 기숙사 생활을 했었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학교에 대한 추억이 조금 더 많아요. 우리보다 1년 선배이자 언니였던 장상 전 총장님(수학교육과·62년졸)이 어느 날 저희 기숙사 사감 선생님으로 오셔서 어색했던 기억, 가을에 다 같이 송편을 빚거나 밤나무에서 떨어진 밤을 삶아 먹던 기억 등 기숙사에 살면서 생긴 일들이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오랜만에 방문해보니 옛날 기숙사가 있던 자리에 새로운 건물(현 이화·포스코관)이 들어서서 잘 못 찾겠더라고요.
또 옛날이랑 달라진 건 아닌데, 아직도 학교 안에 후윳길이 있나요? 그 후윳길이라는 이름이 저 학교 다닐 때 채택된 이름이에요. 학보사에서 이름 공모를 받았었거든요. 우리끼리는 교문에서부터 본관까지 올라가려고만 해도 ‘후유~’ 하면서 숨이 찬다고, ‘후윳길’이라고 부르면 어떻냐고 얘기를 했었는데 그게 정식 이름으로 채택돼서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는 거예요.
*사진 : 6-70년대 휴웃길 모습(출처 : 이화역사관)

채명진 동문: 제가 학교 다닐 땐 이화교가 있었어요. 그 아래에 기차가 지나다녔고, 기차의 꼬리를 밟으면 행운이 오고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었어요. 저 멀리서 기차 소리가 나면 멀리서부터 뛰어와서 일부러 꼬리를 밟고, 그런 추억이 있네요. 그리고 저희 때는 대동제를 했는데, 항상 대미를 장식하는 행사는 영산 줄다리기였어요. 3월부터 학생회에서 줄을 꼬라고 시키면 다들 억지로(웃음) 줄을 꼬고 5월 대동제에서 그 줄로 줄다리기를 하고 그랬어요. 지금은 ECC가 있는 대운동장에서 줄다리기를 했는데 지금은 대운동장이 없다는 게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사진 : 채명진 동문 학창시절 사진들

Q. 다른 학교가 아닌 이화를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심양식 동문: 저 때는 여학생들이라면 거의 대부분 이화대학을 갔었어요. 다른 대학을 간다는 생각 자체를 크게 못 해본 것 같아요. 그때는 영문과랑 가정과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그다음은 국문과였어요. 그래서 국문과에 특히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편이었고요. 그 당시에는 재수라는 개념도 없었는데 저는 정말 운 좋게도 이화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영자 동문: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느 대학이 좋고 어느 대학이 별로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어요. 또 당시에는 2년제 대학이었던 수도여자사범대학만 나오면 누구나 가사 선생님을 할 수 있었던 데다가 여자는 그런 데를 가야 현모양처가 된다는 인식이 강했던 시기라 어른들은 모두 그 학교를 가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당시 연세대학교를 다니던 저희 오빠가 반대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마침 연세대랑 이화여대랑 바로 옆이니까 오라버니한테 대신 이화대학 원서를 사서 접수를 해줬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잘 몰랐는데 대학에 와서 다녀보니까 오빠한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사진 : 이영자 동문이 간직하고 있는 합격증, 학위증, 졸업식순
심양식 동문: 당시는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 자체가 흔한 일이 아닌 시기인데다가, 이화대학에 대해 사치스럽다거나 등등의 편견도 있었죠. 저희 어머니도 처음에는 그런 이유로 반대를 하셨는데, 학교에 와보시고는 교정의 아름다움에 반한 거예요. 그 뒤로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채명진 동문: 저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이화를 졸업하셨기 때문에 저도 이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고 있었어요. 굳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제 선택지에는 항상 이화가 있었던 거죠. 사실 강요하지 않으신 건 아니고요, 꽤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웃음)

Q. 특히 이화에 입학하기 전과 입학한 뒤 느끼신 점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영자 동문: 많이 다르죠! 저는 국민학교 시절에도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한참을 걸어 기차를 타고 가서 내려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는 시골 동네에 살았어요. 그러다가 중학생 때 한국에서 열린 첫 박람회를 보러 상경한 게 첫 서울 방문이었어요. 두 번째 방문은 대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온 날이었으니까, 그전에는 이화대학을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죠. 저는 합격 소식도 당시 서울에 있던 오빠가 전해줘서 들은 거라 정말 이대생이 된 다음에야 학교를 왔는데, 와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리고 저는 첫 채플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특별 연주로 플루트 연주가 있었는데, 저는 그 악기를 거기서 처음 봤거든요. 정말 황홀했어요. 나중에 내가 딸을 낳으면 저 악기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였어요.
* 사진 : 1960년대 대강당(출처 : 이화역사관)
채명진 동문: 그렇게 배우기 시작한 플롯인데, 결국 대학은 사학과로 왔네요. (웃음) 사실 이대는 다닐 때도 좋지만, 졸업하고 나면 훨씬 좋은 학교라고 생각해요. 지금 다니는 학생들한테도 어른들이 그런 말씀 많이 하시잖아요. 여자아이들하고만 학교를 다닐 때 생기는 유대감 같은 게 있는데, 그 유대감이 나중에 세상을 살다 보면 더 커져요. 당장 저만해도 살면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이 되는 과정에서 이대 동문이 모티브가 된 경우가 참 많거든요. 학연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엔 약간 부족한, 이화 동문 간에 생기는 특유의 느낌이 있어요. 간혹 이화에 처음 입학할 때 아쉬워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는 걸로 아는데, 전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김지연 벗: 남녀공학을 다니는 친구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남학생의 비율이 높은 경우가 많다 보니 비슷한 조건일지라도 남학생에게 밀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화에서는 같은 여자들끼리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아요. 실제로 이화에 입학해보니 우리 학교가 자기 계발을 하는 데에 있어서 정말 탁월한 학교라는 생각이 더더욱 많이 들어요. 무엇보다 똑똑한 벗들이 정말 많아서 배우는 점도 많고요.
김지윤 동문: 마침 5월은 한창 대동제 준비로 바쁠 기간일 텐데, 저는 우리 학교만이 갖고 있는 독특하고 깨끗한 분위기의 대동제를 정말 좋아해요. 학생들끼리 소소하게 놀고먹고 즐기는 그런 분위기요. 그리고 우리 학교 학생들이 특히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높은 편이잖아요. 그런 걸로 종종 공격을 받곤 하는데 ‘정말 좋은 걸 어떡해?’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웃음)
이영자 동문: 100년이 넘는 전통이라는 걸 절대 무시할 수가 없지요.

Q. 딸이나 손녀가 이화를 선택할 때 기분이 어떠셨는지 듣고 싶습니다.
이영자 동문: 옛날에 100점 손주였다면, 이화의 후배가 된 뒤 120점 손주가 됐어요. 그 정도로 자랑스럽고 예뻐요. 덕분에 이렇게 인터뷰 자리가 생겨서 더 고맙죠.
심양식 동문: 지연이가 맨 마지막으로 이화에 들어왔잖아요. 얼마나 속이 후련했는지 몰라요. 특히 지연이네 아빠가 정말 좋아했죠. 주변에는 엄마, 아내, 딸, 여동생, 장모님까지 모두 이화여대 출신인 여자들밖에 없는 셈이니까요. 다른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합격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도 온 가족이 이화여대생이 되는 것만큼 기쁘지는 못한 것 같아요. 지연이가 온 가족의 소원을 다 풀어준 셈이죠. 덕분에 특별한 가족이 됐으니까요.

Q. 3대 이화 가족인 만큼 이화가 여러분에게 갖는 의미도 남다를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이화’란 무엇인가요?
심양식 동문: 이화는 나의 ‘자랑’입니다. 제가 이화대학을 다니고 그 당시의 교육을 받았던 것이 정말 자랑스럽거든요. 총장님과 부총장님을 포함해서 이화에 계신 모든 선생님들이 다들 검소하시고 성품이 훌륭하셔서 인성 교육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로 깨우침을 얻은 것도 많고요. 자칫 잘못하면 이화라는 이름에 누를 끼칠까 봐 밖을 나가면 행동을 더 조심하게 돼요.
이영자 동문: 이화는 나의 ‘기둥’이고 ‘자존심’입니다.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에 간 여자들도 얼마 없었을 정도로 고등교육을 받는 여자가 극소수였어요. 대학까지 가는 사람은 더더욱 적었고요. 게다가 저의 경우는 말씀드린 것처럼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더 심했죠. 그래서 저는 살면서 제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행동을 하면 ‘시골에서 그 좋은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저러나’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노파심에 항상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생각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는 그 시절에 ‘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한테 손가락질 받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갖고 살았죠. 그 덕분에 아직까지 이렇게 건강한 몸과 정신을 갖고 살아오지 않았나 싶고요.
채명진 동문: 이화는 나의 ‘자부심’입니다. 이화라는 타이틀이 메리트가 됐으면 됐지 절대 디메리트가 되지는 않거든요. 더군다나 제 딸들까지 이화에 입학했으니, 진심으로 학교가 잘 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김지윤 동문: 저한테 이화는 ‘편안한 집’ 같아요. 언제 가도 편안하면서,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굉장히 힘을 많이 주는 든든한 존재거든요. 심적으로 정말 큰 위안이 됩니다.
김지연 벗: 저에게 이화는 ‘뿌리’이자, 요즘 많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라고 생각합니다. 이화를 다니면서 옳은 불편함과 옳은 예민함을 배울 수 있었고 그걸로 인해서 제가 되게 구원받는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화 덕분에 참 많이 성장한 것 같습니다.

할머니부터 엄마, 손주까지 3대가 모두 '이화 가족'이라는 자부심으로 이화투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 기쁘다는 말과 함께 3대 이화 가족과의 인터뷰를 마쳤는데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이화를 향한 가족분들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3대 이화 가족의 ‘꽃길’을 이화투데이가 응원하겠습니다!


- 이화투데이 제11기 리포터 유재현(뇌인지과학과·18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