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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가을맞이 시인과의 만남 : 정끝별 교수님의 시(詩)이야기

  • 등록일2017.11.14
  • 5175

어느새 가을이 만연한 10월이 되었습니다. 캠퍼스를 걷다 보면 마주하게 되는 청량한 하늘과 빨갛게 익은 단풍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벅찬 계절인 것 같아요. 오늘은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본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님이자, 시인이신 정끝별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준비했습니다. 시험기간 공부에 지친 벗들이 오늘 저희가 준비한 특별한 만남을 통해 잠시나마 마음을 쉬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Q. 안녕하세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1983년도에 인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석사하고 박사하고 강의를 하면서 20여 년을 학관, 중앙도서관, 대강당 지하를 세 꼭짓점으로 삼아 어슬렁거렸습니다. 그리고 10여 년을 다른 대학에서 근무하다가 2014년도부터 이화캠퍼스 국어국문학과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정끝별입니다. 

 

Q. 교수님께서는 시인이자 평론가이며, 스승이신데요. 각각의 역할이 교수님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요? 

시인, 평론가, 교수를 연결하는 공통분모는 시입니다. 시를 읽고 쓰고 가르치는 게 제 삶이죠. 이대에 들어와 처음 시를 썼어요. 좋은 시를 쓰고 싶은데 좋은 시가 어떤 건지 궁금해 공부를 하게 되었고, 공부한 게 아까워서(실은 써보고 싶어서) 평론을 했고 논문을 썼고, 그런 성과물이 쌓여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거죠. 세 가지를 병행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한 가지나 잘해라’라는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고, 실제로도 한정된 시간을 쪼개서 작업해야 하는 터라 각각으로는 충분히 집중하지 못했던 스스로의 미진함도 있었어요. 한데 어느 시점에서부터 읽고 쓰고 가르치는 게 서로에게 상생 작용을 했어요. 이를테면 시에 대해 각각의 다른 관점에서 넓게 파고들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고 지치지 않았고 서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했어요. '시'라는 구심점은 확실했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글쓰기의 삼다(三多)’법이기도 했으니까요. 한 마디 덧붙이고 싶은 말은, 저는 여성으로서 시를 쓴다는 게 장애가 많은 시대를 살았고 그 장애의 울타리 혹은 벽이 되어 준 것이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기도 했어요. 이 말은 너무 많은 설명과 부연을 필요로 하지만 여러분의 짐작에 맡기겠습니다. 남성 중심적인 문단에서 여성 시인으로서 스스로를 세우고 스스로를 지키고 스스로를 주장하는 데 이화에서 공부를 계속했던 게 울타리가 되었고 도움이 되었어요.

  

Q.  시, 넓게는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이 제일 재미있고 국어 과목을 제일 잘 해서 막연한 동경으로 국문과에 진학했어요. 국문과에 진학했으니 문학 관련 동아리활동을 하면 도움이 되겠다 싶어 또 막연하게 이화 문학회에 가입했고, 거기에서 문학과 시에 눈을 떴어요. 시작하면 끝을 보는 게 제 유일한 재능이라서 끝까지 문학회 활동을 했고요. 실은, 거기서 만난 괴짜 선배들이 멋있었고 좋았고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시를 잘 쓰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제 기준은 ‘사람’이었어요. 그때의 저에게 사람은 시를 아는 사람과 시를 모르는 사람, 시를 잘 쓰는 사람과 못 쓰는 사람, 시 같은 사람과 시 같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었어요. 저는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부터 시를 시작했습니다. 그게 시의 임무이자 역할이기도 하더군요. 


Q. <은는이가>, <추파, 춥스> 등 교수님의 작품들은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는 평을 많이 받는데요, 이러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물론 사소하고 사소한 일상들에서지요. <은는이가>는 김소월 시 특히 <산유화>를 읽다가 주격조사를 헷갈려 하는 중국 유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조사의 중요성에 대해 일갈한 어떤 글을 읽다가 포착된 시이에요. <추파, 춥스>는 어린 딸들이 좋아하는 사탕이라서, 또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를 읽으면서(추파춥스 로고를 디자인 사람이 달리입니다.), 추파(秋波)라는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쓴 시예요. 두 시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어요. 시는 거창한 것에, 특별한 것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속한 크고 작은 집단, 사회, 시대와의 관계 속에 있는 거지요. 그러니 그 관계에 대한 호기심과, 조금 더 부지런한 언어감각과, 시에 대한 열정만 있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어요. 시적인 것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게 다 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미를 포착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 자, 그리고 언어화하는 자가 특별히 시인인 것이죠.


정끝별


Q. '좋은 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 역시 그게 궁금해서 제가 시를 더 공부해보겠다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30년 동안 공부를 했고, 그 답을 얻으려고 여전히 쓰고 또 공부하는 중이고요. 예전에는 그 질문에 제 나름의 기준과 가치를 펼치며 대답해보려 고심했었죠. 좋은 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훌륭한 시, 의미 있는 시, 감동적인 시들을 구별해보기도 하고, 당대가 요청하는 시, 당대를 넘어서는 시의 차이를 살펴보기도 하고, 좋은 시의 반대인 나쁜 시들의 예를 들여다보기도 하면서요. 그래서 얻는 답이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그러나 대답하는 순간 무너지는 답 들이었어요. 시에 대한 정의가 오류의 역사였고, 시적인 것이란 늘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었요. 짜장면과 짬뽕도 결정하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자리가 시의 자리이기도 해서, 시가 무엇이냐는 물음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 어떤 시가 ‘좋은 시’냐는 물음이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서 대답해 본다면 “시는 오(五)도다”예요. 에너지로서의 ‘열도’, 성찰로서의 ‘집중도’, 형식으로서의 ‘완성도’, 간절함으로서의 ‘기도’, 실험으로서의 ‘시도’가 있는 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닌 거 같아요. 주관적이고 애매하지요?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Q. 그렇다면 시를 대하는 '좋은 자세'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람에 대한 관심, 사물에 대한 관심, 세계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는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관심이 생겨야 궁금해지고 집중하게 되고, 또 상상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거든요. 매혹의 조건이자 사랑의 조건이죠. 시도 마찬가지예요. 이 시의 어느 부분이 좋은지 어느 부분이 이해가 안 되는지, 사람들은 이 시를 왜 좋다고 혹은 싫다고 하는지, 이 시를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쓴 것인지, 다른 시와 다른 점은 무엇인지, 왜 이렇게 썼을지......, 시가 내게 무슨 말을 걸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집중하고 상상하면서 읽으면 좋겠죠. 그리고 시 혹은 시 비슷한 것을 써보는 것도 시 읽기에 도움이 됩니다.

 

Q. 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혹은 특별히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지금 떠오르는 건 「절필을 선언한 시인」이라는 시에요. “그는 좀체 시 쓸 짬이 없던 시인이었다”로 시작해서, “기필코 절필을 선언한 시인의 <마지막 시>는 이랬다/ 그저, 그뿐인, 그따위, 그 등속의 시야/ 시퉁시퉁 내게 데데한 시금떨떨한 시야/ 시쳇말로 늬들끼리 다 해 먹어라/ 나는 졌다 시시 떼떼에 시시 껍절에/ 나는야 시에 채인 시골뜨기 병시인-”로 끝나는 시에요. 이 시를 쓸 즈음의 저는 아이 둘을 키우며 논문‧평론 쓰기와 강의하는 일들에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랐고, 정말로 시 쓸 시간이 없었고 설상가상 시도 잘 써지지 않은 시기였어요. 이러다 저절로 절필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절필을 상상하면서 써 본 시인데, 두 번째 시집 『흰 책』(민음사, 2000)에 수록하게 됐죠. 한데 시집이 딱 나왔는데 그 제목이 「집필을 선언한 시인」으로 인쇄되어 있는 거예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죠. 시집이 출판되려면 시인을 비롯해 편집자 등 여러 사람이 열 번도 넘게 전문적으로 교정을 보는데 어떻게 못 잡아냈을까 싶었어요. 어찌해야할지 고민하던 중, 최승호 시인이 농담 같은 덕담이 위로가 되었는데 ‘집필을 선언한 시인이 더 좋네. ‘집필을 선언한 시인’들은 없잖아” 하셨죠. 시 본문에는 ‘절필을 선언한 시인’이라는 구절이 있으니 역설적이거나 아이러니컬한 제목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이렇게 오자가 나와서 시를 계속 쓰게 됐는지도 몰라요. 절필을 선언하지 못해서요. 제 무의식은 절필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아니면 어떤 계시 같은 게 있었거나.(웃음)


시집


Q. 다소 삭막해지고 있는 사회에서 인문학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세돌이 알파고와 바둑을 겨누었을 때 '알파고와 시인이 시를 겨룬다면'이라는 칼럼을 썼는데, 그 글에서 AI로 대체 불가능하고 AI와 대체 불가능한 것이 바로 시심이라고 쓴 적이 있어요. AI가 입력 값에 따른 귀납과 결과에 의해 답을 찾는 데 반해, 시심은 호기심과 사랑과 부정에 의해 물음을 찾는다고요. 뇌의 영역 안에서 AI의 역할과 기능은 무한할 법도 하지만, 마음, 가슴, 정신, 영혼의 영역에 있는 시심 앞에서 AI는 참으로 머리가 좋은 똑똑한 아이와도 같지 않을까요? ‘인간은 단순한 운영 체계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거든요. ‘인격체’라는 게 인문학의 뿌리이자 꽃이라고 생각해요. 인문학이 인격체로서의 감각과 감정과 정서와 상상과 언어를 기반으로 삶과 시대와 역사와 연대하면서 그 맥락 속에서 생성된다면 디지털 혁명, 4차 산업혁명 운운하는 지금 혹은 미래의 시대야말로 인간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근간으로 하는 인문학이 더 절실하게 요청되고 또 요청되어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성 능력과 인류의 진화능력을 믿거든요. 

Q.  제자들에게 시 한 편을 추천해 주신다면 어떤 시를 소개하고 싶으신가요? 
일간지에 매주 다른 시인들의 시를 소개하고 있는 중이니, 오늘은 제 시를 소개할게요. 다섯 번째 시집 『은는이가』(문학동네, 2016)에 수록된 <한 걸음 더>라는 시인데, 힘들 때 제 스스로를 위무하면서 쓴 시예요. 힘든 나날들을 통과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요. 20대에 가장 힘든 것은 막막함과 불확실함일 거예요. 막막하고 불확실한데도 우리는 가야 하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몰려서 가기도, 몰라서 가기도 하죠. 하지만 어찌 되었든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가다 보면 어딘가 도달하게 돼요. 앞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 그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나아갔을 때 우리는 어딘가에 이를 수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어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만 걸음이 되고 만 걸음, 만 걸음이 모여서 미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힘들겠지만 오늘도 한 걸음 더!



한 걸음 더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사랑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 해도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일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Q. 앞으로 어떤 작품을 창작하실 계획인가요? 후에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도 궁금합니다.
등단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가까스로’이긴 하지만 30년 동안 ‘한 걸음에 한 걸음’을 더하며 시를 놓지 않고 써왔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기도 합니다. 한 걸음에 한 걸음을 더했다는 의미는 그만두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어쨌든 조금씩 나아갔다는 의미일 겁니다. 앞으로도 한 걸음에 한 걸음을 더해가며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시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작가로 기억되는가는 저의 몫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조금씩 다른 시를 쓰는 시인, 이전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쓰는 시인, 갈수록 시가 더 깊어지는 시인, 다시 보니 더 좋은 시를 쓰는 시인,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는데, 참 뚱뚱한 꿈이지요?

정끝별

잔잔한 감동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던 정끝별 교수님과의 인터뷰였습니다. 이화인 여러분도 가을을 맞아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이 깊어지는 시 한 편 읽어보는 게 어떨까요? 
 

이화투데이 리포터 9기 김이경(국어국문·16), 최혜민(중어중문·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