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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일본 영화 최고 흥행작 〈너의 이름은.〉 번역의 주인공, 강민하 동문(신문방송학·99년 졸)

  • 등록일2017.09.15
  • 6930

〈너의 이름은.〉, 〈러브레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등 일본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서 흥행한 영화들의 자막 번역을 이화 동문이 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일본 영화의 번역을 이화투데이가 번역가 강민하(신문방송학·99년 졸) 동문을 인터뷰를 통해 만나봤습니다.


1.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신문방송학과 94학번으로 영화 번역을 해오다가 2년 전부터 프로듀서로도 활동하는 강민하입니다. 

 

2. 도쿄의 쓰다주쿠 대학교에서 1년간 교환학생으로 수학하고, 97년도에 돌아오자마자 필름컬쳐영화제 상영작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 번역 일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생으로서 영화 번역을 시작하기 쉽지 않으셨을 텐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저는 영화를 워낙 좋아해서 막연히 영화와 관련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가 대학 들어갔을 당시,  『씨네 21』이 처음으로 창간이 되었어요. 그전에는 『스크린』이나 『로드쇼』 같은 해외에서 들어온 영화잡지들이 있었죠. 사진이나 브로마이드 위주의 잡지들이 지배적이었는데,  『씨네 21』 같은 잡지는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곳에 기자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환학생을 갔을 때 『씨네 21』에서 일본 통신원 모집공고가 났고, 지원자는 기사를 써서 보내보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때는 일본 영화가 한국에 정식으로 개봉할 수 없는 때였어요. 1999년에 문화 개방이 됐기 때문에  대학시절에 불법 비디오테이프로 학회실에서나 과방에서 보곤 했어요. 재밌는 영화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영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마침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영화에 대해서 기사를 써서 보낼 기회가 생겼던 것이죠. 지원 기사를 어떤 내용으로 쓸까 고민하다 일본의 작은 독립영화제 중 '피아 영화제'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는 독립영화를 하는 분들이 제작비 마련도 힘들지만 또 그 영화를 대중들에게 선보일 기회도 많지 않은데, 일반인들이 독립영화를 만들어서 출품을 하고 영화제를 한다는 게 당시 저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렇게 '피아 영화제' 관련 기사를 썼는데 다행히도 뽑아주셔서 통신원을 하면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통신원을 하는 동안 2주에 한 번 기사를 작성해서 제출했어요. 그렇게 취재를 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인들을 인터뷰할 기회도 생기게 되었고, 한국에서 파견된  『씨네 21』 기자와 동행해서 취재도 다니는 등 실무적인 경험을 쌓게 되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도 생각하기도 하는데, 또 무모한 도전 정신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때 그 일에 도전했던 것이 영화계에 발을 담가서 일을 하게 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우리나라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 생겼고 일본 영화들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소개가 되기 시작하면서 일본 영화 통역, 번역, 정보를 전달할 사람이 필요해졌어요. 저는 어느 정도의 경험이 있었고 교환학생에서 돌아와서 반 년 정도 휴학한 상태였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해보자는 심정으로 자막 번역에 도전 겸 자원을 했어요.


제가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에요. 제가 처음 영화의 자막 번역을 맡았을 때 막막했습니다.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않았기에 극장에 가서 자막이 어떠한 길이로 어떠한 식으로 나오는지 보고 직접 깨닫는 수밖에 없었어요. 일본 영화를 스크린용으로 번역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시작한 영화제 일이 결국 영화의 번역가로서 입문을 할 수 있게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3. 교환학생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20여 년 전에 교환학생을 다녀오시는 일은 흔치 않았을 것 같은데,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1년 동안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를 시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예요. 일본어를 시작한 이유는 학교에서 제2외국어를 기본적으로 수강해야 하기도 했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자각을 하면서 외국어를 배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엄청난 포부가 있어서 배운 것은 아니에요. 프랑스어를 할까 일본어를 할까 고민을 하다가 원래 제2외국어이던 불어보다는 일본어를 새로 시작하는 게 더 재밌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일본어를 1년 동안 했는데, 진짜 열심히 했고, 또 재미도 있었어요.


그러던 중 교환학생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도 교환학생 선발전형이 치열했어요. 필기시험, 인터뷰 시험을 보고 참 다행히 통과를 하여 일본에 가려고 마음은 먹었는데, 그때 사실 집안이 그렇게 넉넉한 편이 아니었는데, 부모님도 마침 제가 대학을 다닐 때 한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셨어요. 유학 간다고 말씀을 드리면 갈 수가 없을 것 같은 거예요. 다행히 교환학생 일부에게 주는 일본의 국비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생활비 지원을 비롯한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일본에 교환학생을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교환학생을 간 쓰다주쿠라는 대학은 여자대학이었고 작은 학교긴 했지만, 학교에서 매년 교환학생으로 교류를 하는 학교였어요. 그 학교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만, 미국 등 다양한 나라에서 교환학생들이 왔는데, 외부에서 어떻게 이화여대생을 보는가를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어요. 굉장히 성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같은 여자대학이지만 굉장히 큰 학교에서 왔다, 레벨이 높은 대학교에서 왔다고요.(웃음) 이화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서 교환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저는 교환학생을 하면서 제 전공인 신문방송학과와 유사한 학과가 없어서 국제관계학과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때 동아시아나 한일 관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는데, 단순히 그 작가와 일본 입장에서 쓴 책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면에서 일본이 아닌 나라의 입장에서 깊이 있게 쓴 책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어떤 면으로는 우리나라 입장에서 국사책이나 역사 책을 많이 접했던 경험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가치관도 좀 더 새롭게 보게 되었어요. 그때 공부한 책들은 일본의 역사 책은 아니었고, 국제관계학을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이 돌아보시며 집필하신 책 들이었는데 오히려 ‘위안부’ 문제와 같은 제재를 더 깊이, 일본 정부 입장과는 달리 조사한 책들도 많이 있었어요.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아시아, 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관계들로 경제, 문화적으로 협력해 왔는지 공부도 할 수 있어서 제 시각이 많이 넓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입학하고는 노느라 그런 책을 찾아보지 않았었는데 참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학과의 특성에 맞는 세미나라든지 학회와 같은 것이 굉장히 발달이 되어 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학회를 하면서 미국의 하와이와 같이 본토에 귀속된 격인 일본의 오키나와라는 섬에 관하여 소수민족이나 과거의 정치, 흡수 과정 등을 깊이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실제로 학회 분들이 비행기를 타고 다 같이 가서 오키나와의 왕족 문화, 원주민들의 생활, 골격의 차이 등을 실제로 공부하는 탐사를 가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체험의 학습도 굉장히 잘 돼 있었는데 소수민족을 흡수하면서 있었을 충돌, 미군 기지를 둘러싼 운동 등도 일본인들의 입장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연구를 하더라고요. 전혀 다른 공부를 접하게 된 것도 같은 학과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던 특별한 공부이자 체험이었습니다.


특히 국제관계학과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가 영화 번역 작업을 하는 큰 도움이 됐어요. 영화가 굉장히 많은 주제를 다루는 콘텐츠잖아요? 어떤 작품을 받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자막을 완성시키는 기간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예를 들어 정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정치에 대한, 정치적인 용어나 언어에 대해서 제가 알아야지 제대로 한국어로 번역을 할 수 있어요. 이처럼 번역 작업에 있어 배경지식을 미리 조사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SF일 때 전혀 다른 용어, 마니아들이 알고 있는 용어를 조사가 필요하고 역사물, 시대물 등 특정 시점을 다루기 위해서는 역사적 기본 지식이 필수입니다. 여러 가지 조사를 하는 시간이 필요한데, 근현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영화라면 제가 교환학생을 하면서 경험하고 배운 것이 근현대사의 관계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4. 교환학생을 가기 전과 가고 난 후의 달라진 점이 있었나요?


교환학생을 가기 전에는 그저 학교와 신촌을 오가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면, 다녀온 다음부터는 어떠한 제안이 들어왔을 때 용기가 생겼고, 새로운 일에 두려움이 없이 도전하는 학생이 되었어요. 공부를 하면서 다른 것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삶을 살게 됐어요. 요즘 젊은 분들이 지금 일을 계속하는 것이 좋을지, 워킹홀리데이라도 갔다 오는 것이 좋을지 물을 때면 저는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해외에 나가보라고 얘기를 해요. 왜냐하면 그 나이 때 새로운 환경에서 무언가에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제 인생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해외에 나가서 공부를 하면서 그 나라의 책을 읽게 되는 경험도 아주 이색적이고 좋은 경험이 되었어요. 물론 한국에서도 충분히 훌륭하게 성장하는 분도 많고, 본인의 길을 찾는 분들이 많이 있지만요. 대학교 1학년 때 저의 세계는 학교 앞과 신촌에만 있었는데, 교환학생을 다녀온 후에는 세상을 보는 눈과 어떠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폭넓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꼭 공부가 아니어도 20대에 해외에 나가서 무언가를 해보는 것은 인생의 방향을 바꿔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같은 길을 가도 색이 더 짙어지고 깊이가 깊어지는 변화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5. 이화에서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지금 가장 그리운 그때만의 추억이 있으신가요?

 

저는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모범생도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일본어 공부는 저 스스로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학교 밖에서도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 수업도 잘 나간 편이었고 학점도 아주 낮지는 않았지만 많이 놀았습니다. 연애도 열심히 했죠.(웃음) 그리운 추억이 많이 있어요. 저는 과에서 학생회 활동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재학할 당시는 지금처럼 학부제가 아니었고 과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신문방송학과는 한 학년이 60명 정도였어요. 그중 친한 친구들은  9명 정도되었는데, 모두 과의 학생회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친했던 거예요. 그 당시는 횃불을 들고 화염병을 던지던 시대는 아니었지만 시민운동, 학생운동, 데모를 할 때에는 저도 참여했었어요. 사실 그때는 대학생들의 치열한 학생운동이 있다가 가라앉았을 시점이었죠.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또 제가 신문방송학과다 보니 언론이 이야기하는 것이 다 진실만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품고 지냈었어요. 실제 사례를 찾아보기도 했었고요. 또 주위의 친구들이 저를 이상한 친구로 생각했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저는 학생운동에 나가면서도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열심히 놀면서 수업에는 빠지지 않았고 연애도 열심히 했고, 부자도 아니면서 가난한 것도 아니었고요. 제 삶은 이렇게 여러 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삶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학창시절을 모범생으로만 지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아요.


강민하


6. 학부생 시절 전공하신 신문방송학과 번역의 접점이 있을까요?

 

저는 제가 하는 번역이라는 일이 외국의 어떤 문화를 그 나라의 언어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로 가장 알기 쉽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단지 소설이나 시, 영화, 드라마 노래 가사 등 어떤 콘텐츠를 번역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물이나 번역을 하는 스타일이 달라질 뿐이죠. 그렇지만 공통점은 한국어를 통해 알기 쉽게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방송학을 전공 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보다는, 한국어로 무언가를 읽고 쓰고 남들에게 표현하는 일에 적합한 사람인지 아닌지, 혹은 그것에 도움이 될 만한 경험을 쌓아두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문예부 활동을 하면서 시와 글을 쓰고 문집을 편집하고 취재도 하며 글을 쓰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어요. 누군가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표현이잖아요. 그래서 번역 일은 '타인을 위해서 표현을 하는 것에 익숙해진 무언가를 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가고 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도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본 것을 누군가에게 글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사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를 다녔어요.(웃음)―그런 의미에서 인생이 순간순간 연결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해요. 제가 살아온, 그리고 관심을 가져온 것들이 번역이라는 일과 맞물리고, 성격적으로나 삶의 스타일도 번역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 좌우명이 있냐 누가 묻더라고요.  지금 생각을 해보니 저는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중시해요. 그런데 그 순간순간을 중시한 것들이 축적이 되면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져요. 그래서 젊은 분들에게도 지금 무엇인가를 새롭게 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면 가능한 그것을 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7. 〈하울의 움직이는 성〉, 〈원령공주〉, 〈붉은 돼지〉, 〈토토로〉 등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들,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하나와 앨리스〉, 기타노 타케시 감독의 〈소나티네〉, 364만 관객이라는 기록으로 역대 일본 영화 최고 흥행작에 오른 〈너의 이름은〉 등 내로라하는 영화를 꾸준히 번역해오셨습니다.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느 분야이나 프리랜서들은 다 하는 이야기가 일이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수입이 사실은 일정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떤 면에서는 프리랜서로서 어떻게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질문과 관련이 있어요. 수입이 줄어들 때, 그리고 일이 별로 없을 때 어떻게 잘 넘기고 유지하느냐가 그 일을 계속하느냐 안 하느냐를 결정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죠. 물론 돈이 없는데 참고 살아야 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프리랜서로서 오래도록 꾸준히 가기 위해서는 힘든 시기가 와도 버틸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번째는 번역을 맡기시는 분들이 고객이잖아요. 고객에 대한 신뢰를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뢰라 하면 번역의 결과물과  마감일을 지키는 것은 기본이고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원활히 해야겠죠. 이러한 것들을 지키는 것이 결국은 신뢰를 쌓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모든 일이 마찬가지이지만 번역을 하려면 성실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작업을 할 때는 며칠 밤을 새우기도 하는데, 물론 밤에 작업이 잘 되기 때문이라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 않으면 때로는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퀄리티가 안 나올 때가 있거든요. 여러 가지 예상치 못한 사항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성실성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뢰감이라는 것이 단순히 열심히 한다는 것을 넘어 결과물의 질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포스터


8. 번역이라는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요?

 

그 일을 좋아하게 된 것이죠. 저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의미 있고 보람된 일이라고 느꼈고요. 여러 종류의 번역이 있는데, 제가 하는 것은 훌륭한 사람들이 만든 재미있는 영화를 번역하는 거잖아요. 저는 그것을 전달하는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너무나 보람된다고 생각해요. 자막을 번역을 하고 스크린으로 처음 시사회에서 확인을 하러 가보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나고 난 이후까지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로 잘 나올지, 남들이 어떻게 볼지에 대한 생각으로 긴장됩니다. 


또 하나는 영화번역을 하게 된 것에 대한 흥분감이 지금까지도 있어요. 지금도 시사회에 처음으로 극장에 가서 제가 번역한 것을 보게 되면 심장이 요동을 치거든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 제가 스스로 이 일을 매우 좋아한다고도 생각해요. 아직 20년은 안 됐지만 정식으로 극장 상업용 영화를 한 것은 1999년에 첫 영화가 개봉을 했으니, 이렇게 오래 번역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9. 영화번역에 대한 선배님의 주관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철칙은 먼저 그 나라에서 그 감독님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나왔던 긍정적인 반응을 살펴보고, 그것과 가장 유사한 반응이 나오도록 번역하는 것이 좋은 번역이라는 생각을 해요.  관객들의 문화, 언어,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똑같진 않아요. 그렇지만 이러한 철칙을 가지고 있어야 과한 해석 등의 도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극장 외에도  과거에는 비디오테이프, 현재는 DVD 등 기록물로 소장이 되고 공유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행을 타는 말이나, 그 시대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언어는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어요. 그런데 유행하는 말을 쓰면 젊은 분들은 재미있게 보기 때문에 굉장히 고민할 때도 있어요. 이런 고민은 문화콘텐츠나 소설을 번역하는 분이라면 공통적으로 하는 고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명 어딘가에 기록되고 남게 되는 매체이므로, 지금은 특정 언어를 잘 받아들이지만 15년 뒤에는 ‘이게 무슨 소리야’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고, 그렇게 영화가 이해되는 맥락을 놓치게 한다면 영화를 만든 감독님에게 죄송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지금 우리들이 쓰고 있는 특정 용어는 반영이 될 수밖에 없지만, 아무도 추측하지 못할 것 같은 유행어라든지, 갑자기 생겨났다가 사라질 것 같은 말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나름의 철칙이 있어요. 그것이 안 좋다기 보다, 저에게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코믹한 영화에서는 그 원래의 의도를 살려 전달해야 하다 보니, 단어 선택에 대한 부담이 많이 있죠. <너의 이름은.〉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은 작은 웃음 요소들이 많이 있었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재치를 발휘해야 했는데, 그 재치가 도가 넘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었습니다.

 

또한 관객에 대한 배려심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짧으면서도 이해하기에 좋은 단어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막은 1초, 2초 올라가고 바뀌는데 그 순간 ‘저게 무슨 말이야’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수준급의 일본어 구사자와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번역 사이에서 괴리감이 들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많은 대중들을 기준으로 쉽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심야식당' 1편, 2편을 번역했었는데 음식 이름을 번역하기 어려웠어요. 모두가 알고 있겠다 싶은 음식들은 고유명사 그대로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생소한 음식은 풀어서 자막으로 올리기도 했어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일본어가 아닌 경우에는 그대로 쓰지 않아요. 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 번역이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예를 들자면, ‘실화냐?’라는 말투가 현재에는 유행이지만 15년 뒤의 제가 번역한 영화 자막을 보는 관객들은 ‘저게 무슨 뜻이야?’ 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되 최대한 유행어 사용을 지양하려고 합니다. 


괴물아이


영화 '괴물아이' 감독과의 대화의 통역 장면 / 사진출처 : 씨와이무비


10. 어떤 기준에 따라 번역 작업을 할 영화를 선택하시나요?

 

현실적으로 스케줄이 되는지가 영화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이에요. 솔직히 유명세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번역료 등 실무적인 것을 먼저 물어보는 편이에요. 그런 후에 어떤 영화인지를 알아보고, 힘든 장르의 영화나 너무 깊은 세계관을 가진 작품, 또 제가 관련 경험이 없으면 고민을 하게 됩니다. 저는 제 역할이 대중을 위해서 번역하는 것이라고 생각기 때문에 일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분들이 영화를 보고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마니아층이 두꺼운 영화의 경우에는 맡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하고, 맡게 될 경우에는 영화사와 어느 수준의 단어까지 풀어서 번역할지 조절합니다. 

 

11. 번역가로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으신가요? 또한 때로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있는지 궁금합니다. 

 

〈너의 이름은.〉은 번역이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한국어에서는 남녀 간의 언어 차이가 없어서 힘들었고, 또 일본의 전통문화가 많이 나와서 그대로를 살리느냐 마느냐의 고민이 많이 되었던 영화에요. 10월에 한국에서 개봉하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같은 로맨틱 영화가 가장 자신이 있는 분야입니다. 〈러브레터〉,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이 슬프면서도 아련한 영화들이 가장 저의 특기가 살아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거의 200편 가까이 작품을 했는데, 흥행하지 못한 영화에도 나의 글이 들어가 있고, 또 오랫동안 계속해서 보다 보면 정이 들어서 뽑기가 쉽지 않네요. 그래도 꼽으라면 저는 〈러브레터〉에 애착이 갑니다. 우리나라에 일본 영화가 정식으로 개봉된 건 1999년도인데, 저는 훨씬 전부터 〈러브레터〉를 접했었어요. 1985년도 개봉작이어서 제가 자막 번역을 할 때 이미 오래된 영화였고, 좋아하는 영화여서 제가 번역한다는 사실이 좋으면서도 부담감으로 다가왔어요. 하지만 지금 번역하는 작품을 가장 사랑해요. 지금의 연인을 사랑하는 것처럼.(웃음) 지금은〈해피 버스데이〉라는 영화를 번역하고 있어요. 겨울에 개봉되는데, 10월에 부산영화제에 출품 예정입니다.


영화포스터


12. 번역을 하시면서 작품을 20번씩은 보신다고 들었습니다. 수 없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시게 되는 좋은 영화만의 특징이 있나요?

 

영화를 만드신 분들은 모두 훌륭한 분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단순히 이 영화가 좋다, 나쁘다로 평가고, 또 제가 감히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13. 번역가로서 예민한 언어감각을 발달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오늘도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화인들에게 추천해주실 학습법이 있으신가요?

 

바른 한국어 사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른 한국어의 기본은 독서라고 생각하고요. 적어도 출판되어서 나오는 책들은 맞춤법이 올바르고 교정되어서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바른 한국어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해요. 또 글을 읽는 습관, 책을 읽는 습관도 중요한 것 같아요. 스마트폰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고, 책을 읽을 시간이 줄어들게 되죠. 저도 최근에 종이책을 잘 보지 못해서 독서량을 늘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나가기 전에 책꽂이에 있는 아무 책이나 집어서 나가는데, 그러다 보면 다양한 책을 읽게 되는 것 같아요. 또 일본 영화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원작 책을 먼저 읽습니다. 한국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번역에 있어서 외국어에 대한 능력보다 그 결과물인 한국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원어 해석을 아무리 잘해도 기본적인 한국어를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번역에 대한 능력이 아니라 단순히 외국어에 대한 능력을 갖춘 것이죠. 더불어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문화적인 맥락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센스, 젊은 분들과의 소통 등 현재 사회의 문화적인 콘텐츠를 많이 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4. 선배님께 '이화', 그리고 ‘이화 DNA’는 무엇인가요?

 

과거의 캠퍼스는 굉장히 고풍스러운 느낌이 있었어요. 역사가 깊고 훌륭하신 선배님들이 많이 나오신 학교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웠고, 또 훌륭한 학교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나는 약간 문제아야’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학교의 역사와 선배님들 속에 나의 이름이 들어가도 될까,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기본적으로 비경한 경외감과 같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학교에 다닐 때보다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 이화가 대단한 학교구나라는 사실을 더 많이 체감하게 돼요. 다닐 때는 날마다 다니는 학교니까 그저 그렇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외부로 나오면 내가 공헌한 것은 거의 없지만, 학교가 혹은 선배님들이 만들어 놓은 든든하고 거대한 멋진 성이 내 뒤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때로는 사람들이 이대 나온 사람들에 대해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영화 대사가 있을 정도로 잘났다고 여기면서도, 비꼬아서 보는 시선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은 일부라고 생각해요. 사회에 나오면 정말 든든하게 학교가 지탱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화 DNA는 ‘당당함’입니다. 영화계에도 선배님들이 많으시고 가족 중에도 많은데, 결과적으로 무엇에 대해서건 당당함이 나와요. 본인이 알찬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자신감과 당당함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5. 열심히 미래를 개척해가는 이화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언가에 도전하는 데에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요. 당장 실리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도전해보세요. 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그 분야의 언저리라도 발을 담가보시길 바라요. 특히 영화 번역 일을 꿈꾸는 후배들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어요. 한국은 영화제가 정말 많은 나라에요. 영화제는 카탈로그 번역이나 영화 번역 등 정말 많은 번역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이 자원봉사가로 참여하기도 하는데, 교통비와 식비밖에 주지 않지만 2, 3차까지 면접을 볼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요. 그런데 경쟁을 뚫고 와서도 일이 힘들어서 중간에 그만두는 분들도 많아요. 열정이 있다면 그것이 출발이 될 수 있어요. 어떤 일이든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 하나라도 이어져 있을 것 같다면 끝까지 도전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애정으로 작품 하나하나를 대하시는 강민하 동문님의 번역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던 인터뷰, 어떠셨나요? 번역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도전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화인 여러분들도 꿈꾸는 미래를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해나가길 바랍니다!


이화투데이 리포터 9기 김수빈, 김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