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국내최초 비연애 칼럼니스트, ‘계간홀로’ 편집장 이진송 동문(국문·12년 졸)
- 등록일2017.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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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이화인 여러분은 연애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마 많은 이화인 여러분께서도 연애를 하고 계시거나 경험하셨을 것 같은데요. 혹시나 연애 상태에 있지 않다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거나 그 상태를 탈출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나요?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연애를 하지 ‘못’하는 자의 정신 승리이고, ‘울지 말고 말해보세요’와 같은 말로 놀림을 당하는 이 사회에 당당하게 비(非)연애를 외치는 이화인이 있다고 해서 만나봤습니다. 화창한 봄 햇살이 내리 쬐는 3월의 어느 날, 이화투데이 리포터가 홍대의 한 카페에서 <계간홀로>의 편집장 이진송 동문(국문·12년 졸)을 만나 즐거운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 안녕하세요!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이화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여대 10년차, 여대 괴담의 주인공 <계간홀로>의 편집장 이진송입니다. 반갑습니다. 가끔가다 학교에서 후배들을 만나면 다들 저를 ‘아니 저 언니가 아직도 학교를 다니고 있나’하는 마치 귀신을 본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더군요.(웃음)
Q.편집장으로서 <계간홀로>를 소개하신다면, 어떤 잡지인가요?
제가 만들고 있는 잡지 <계간홀로>의 풀 네임은 ‘전방위. 무정형. 비(非)연애 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입니다. ‘비(非)연애 인구’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연애하고 있는 사람들이 읽어도 여전히 좋은 연애 담론과 또 이 세상에 ‘비연애’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그런 독립잡지입니다. 제가 혼자서 4년째 만들고 있고요, 2013년 2월 14일에 발간을 시작해서 2017년 2월 14일에 10호를 맞이한 나름 독립잡지계의 암모나이트 같은 존재랍니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연애를 하지 않는 싱글들의 삶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다가 지금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연애로 규정하는지, 어떤 연애를 권장하고 승인하는지 그런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는 식으로 층위가 넓어졌어요. 그래서 이 비연애인구라는 말이 단순히 연애를 안 하는 것 뿐 만이 아니라 세상이 연애라고 규정하지 않는 연애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면, 여자 친구 둘이 데이트를 하고 있어도 사람들은 그 둘이 연애를 하고 있다고 보지 않거든요. 사람들이 그것을 연애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건 우리 사회에서 비 가시화된 ‘비연애’인거죠. 그런 것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고 해서 잡지 창간 1주년이 지나면서부터 비연애에 대한 의미를 확장하게 됐어요. 또 보통의 인쇄매체와는 달리 저는 한글 2010을 이용해서 편집을 하고요.(웃음) 저 혼자 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 능력이 닿는 데까지만 만들고 있습니다.
Q. 잡지 <계간홀로>에 대해 질문하기 전에, 먼저 작가님의 대학 생활이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에는 어떤 학생이셨나요?
제가 대학생 때는 굉장히 ‘잉여인간’ 같았어요. 수업도 날씨 좋으면 빠지고 그랬죠. 그리고 저는 문학회를 했는데 많지 않은 인원이 동아리 방에 다 같이 앉아서 소설책 읽고, 시시한 얘기하고 놀다가 자고 그러면서 진짜 잉여같이 지냈어요. 대학생 때는 많이 쉬고, 놀고, 그리고 제 생각과 가치관을 재조정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과거에도 스스로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소위 ‘명예 남성’적인 어그러진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경상도에서 상경했는데 지역 분위기가 제게 영향을 주기도 했고요. 1학년 ‘국어와 작문’(현 우리말과 글쓰기)시간에 토론했던 걸 생각해보면 꽤 체제 지향적이고 지금의 남자들이 좋아할만한 온건 페미니스트 같은 면이 있었죠. 그런데 대학을 계속 다니고 여성학 수업도 듣고 또 다양한 친구들도 만나보면서 제 생각과 가치관을 많이 다듬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대학생활은 제 취향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했고 학교에 갇혀 있던 고등학생 때까지는 전혀 몰랐던 빈곤이나 장애문제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던 시기였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대학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경험하게 해준 통로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특히 제가 다른 학교에 갔다면 이렇게 까지 내가 하는 작업에 확신을 갖고 좋아하면서 활기차게 살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왜냐면 저는 어릴 때부터 ‘여자애가 왜 이렇게 말을 세게 하고 공격적이냐’는 얘기를 들으면서 컸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런 면을 조심하고 조절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대학 1학년 수업시간 중에 제가 발표를 하는데 친구들도 굉장히 좋아해주고 교수님께서도 칭찬을 해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이런 제 화법이 장점이 되는 경험을 했어요. 또 교실에서 어떤 문제제기를 해도 그게 암묵적으로 지지받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일례로, 한 철학 수업에서 남자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차별적인 표현을 쓰신 것에 대해 수업 후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인정하지 않으셨죠. 그러자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다른 학생이 본인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그 주변에 있었던 몇몇 학생들도 동조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주더라고요. 제가 그런 문제제기를 했을 때 ‘쟤 왜 저래?’ 가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같이 문제제기를 해주는 경험을 하면서 저로 하여금 문제제기를 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니고 어떤 면에서는 꼭 필요하고, 또 소수일지라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렇게 제약 없이 토론을 할 수 있는 경험이 전 되게 소중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또 스스로 찾아보고 생각해보는 과정이 필요한 대학공부 자체도 저한테 잘 맞았기 때문에 학교를 즐겁게 다녔던 것 같아요. 참고로 저는 국어국문학이 주 전공이고, 여성학을 복수 전공했고, 철학을 부전공으로 졸업했습니다.
대학 시절 했던 동아리 활동도 기억에 남는데요, 클래식 기타 동아리 ‘예율회’를 하면서 MT촌으로 합숙을 간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간 방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이전에 있던 사람들이 “오늘 밤 몇 커플 성사 목표!”이런 식으로 적어놨더라고요. 그런걸 보면서 대학 MT라 하더라도 다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죠. 저희 학교 같은 경우에는 MT를 가도 연애에 대한 압박이 없잖아요. 선배들이 짓궂게 ‘누구랑 누구를 엮어야겠다’라거나, 원하지 않는 사람과 엮여서 궁지에 몰릴 공포 같은 것도 없죠. 그러다보니 기타 동아리 MT를 가면 가서 기타만 열심히 치고 오면 되고 그런 점이 편하고 좋았던 것 같아요.
Q. 대학 시절 이대학보사에서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셨고, 국문과 스터디 그룹 ‘승강이’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장편소설 『승강이』로 2012년 제7회 이화글빛문학상에서 당선하신 경험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대학시절부터 글쓰기를 참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또 현재도 본교 대학원에서 현대소설 전공 박사과정에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께 글쓰기란 무엇인가요? 또 글쓰기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이 있으신가요?
저는 글을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썼는데 그 때도 백일장이나 공모전 같은 데 나가기도 했어요. 그 때는 저에게 글쓰기가 일종의 돌파구였어요. 왜냐하면 당시 저는 학교 공부가 싫었고, 그냥 학교가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반항을 할 수는 없는 되게 소심한 학생이어서 매일 학교를 꼬박꼬박 나가기는 했죠. 학교 가면 선생님들도 싫고, 친구들도 말이 안통해서 너무 괴로운데 겉으로 보기엔 명랑하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학생이었어요. 학교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선생님들께 건방지다고 혼도 많이 났었거든요. 그리고 입시를 하는 학생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너무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는 무작정 열심히 글을 썼죠.
그러다 대학교에 들어가고서 부터는 약간 글쓰기에 강박이 있었어요. 대학에 왔다고 글쓰기를 놓아버리면 내가 너무 글쓰기를 도구로 이용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래서 초반엔 되게 열심히 글을 썼어요. 당시 저는 빠른 나이에 등단하겠다는 성과에 대한 집착도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가 글을 못 쓴다는 생각이 들면서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둘까 하다가 동아리 친구들과 국문과 친구들을 모아서 넷이서 ‘승강이’라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어요. 친구라고 좋은 얘기만 해주지 말고 정말 한 번 싸우듯이 해보자는 뜻에서 한 친구가 제안한 이름이었죠. 등단스터디로 시작해서 등단작들도 읽어보고, 문예지에 나온 최신 소설들도 읽어보고, 주제를 정해서 같이 써보기도 하고 그랬죠. 그리고 그 무렵에 제게 글쓰기에 대한 전환점도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제 글이 좀 음울하고 속으로 많이 들어가는 그런 글이었어요. 그런데 당시 같이 스터디하던 언니가 제게 “너는 말하는 것처럼 좀 써봐”라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말은 개성 있고 재밌게 하는데 왜 항상 소설은 우울하냐는 거였어요. 그 얘기를 듣고부터 제 글쓰기의 톤과 스타일도 좀 바꾸게 됐죠. 그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글을 쓰겠다고 모여서 복작거리는 그 자체가 제겐 좋았습니다. 괜히 유명한 작가들 까면서 허세도 부리고.(웃음) 그런 게 재밌는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하찮은 경험이 제겐 도움이 많이 됐죠. 이런 다양하고 재밌는 경험들을 원래는 시트콤 각본으로 쓰고 싶었는데 문학회 얘기와 스터디 얘기를 조금 섞어서 소설로 먼저 쓰게 됐어요. 그게 '이화글빛문학상'에서 당선된 『승강이』라는 소설이죠.
이대학보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건, 제 친구가 학보사 기자였는데 칼럼니스트로 지원을 해보라고 추천을 해주더라고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면서 이슈에 대해 고민해보고 스스로 논리적인 글을 쓰는 훈련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당시 고대에서 김예슬씨가 자퇴 선언 대자보를 붙였던 것에 대해서도 쓰고, 비연애 인구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글도 썼었어요. 그리고 릴케의 책을 읽고 슬픔에 자리에 대해 얘기하는 글도 썼었는데 그게 반응이 좋았던 기억이 나요. 당시 저도 항상 즐겁고 마치 맥주광고 같은 삶이 청춘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고 우리가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을 억지로 떨칠 필요는 없다는, 어느 정도 긍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죠.
Q. 대학 시절부터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젠더 텔러’로 활동하시고 폭력, 권력 문제에도 관심이 있어 독일로 교환학생을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또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통해 느낀 점도 궁금합니다.
우선 교환학생은 면접에서는 그렇게 멋있게 얘기를 하기는 했지만 사실 놀고 싶어서 다녀왔어요.(웃음) 학교생활에 지칠 때쯤 환기를 하고 싶기도 했고요. 물론 교환국으로 독일을 선택한 이유는 있었죠. 어떤 잘못에 있어 가해자로서의 윤리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면서, 2차 세계 대전과 관련 있는 독일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제가 교환학생을 갔을 당시 여러 강박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살찌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전전긍긍하기도 했죠. 그런데 교환학생을 가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은 풍채가 좋은데도 굉장히 당당하게 다니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자극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또 교환학생을 가서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일부 서양 남성들의 옐로우 피버(yellow fever)나, 또 아랍계 남성들이 백인 여성들은 건들지 않으면서 아시아 여성들만 희롱하는 것을 보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여성문제가 단순히 여성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이나 국가 문제와도 얽혀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저는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는 운명이 있어요. 저는 80년대 후반생이고 정확히는 88년 용띠인데, 당시는 젠더사이드(gendercide)가 극심할 때입니다. 특히 용띠, 호랑이띠, 말띠 여아에 대해 가장 감별 낙태가 심했어요. 저는 경상도에서 장남의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태어나기 전에 다 저를 남자애인줄 아셨대요. 태몽도 아들이었고 그래서 감별도 안하고 낳았다고 해요. 그런데 어른들이 제게 계속 그런 얘기를 했기 때문에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가 부적절하고 미완성의 결핍을 가진 존재인가라는 고민을 했었어요. 그리고 제가 무언가를 잘해도 어른들이 ‘남자이기만 했어도...’라는 얘기를 많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부분에 대해 불편한 감각이 계속 있었죠. 그런 감정들이 대학에 오니까 그걸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생김에 따라 이해를 하게 되고 막연하게 고통 받았던 지점에 대해서도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어쨌든 저는 항상 부당함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었는데 그걸 잘 설명을 하지 못한 채로 불만에 가득 차 있다가, 여성문제로 조금씩 독해가 되면서 이 분야에 푹 빠지게 된 것 같아요.(웃음) 이런 문제를 다루는 게 힘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화에 오지 않았다면 더 일상적으로 감내해야 했을 차별이나 폭력들이 분명히 내 안의 좋은 점들을 깎고 죽였겠다는 생각도 많이 해요. 왜냐면 처음 잡지를 냈을 때도 사람들은 다 비웃었지만 제 친구들만큼은 호응해주고 재밌어했거든요.
‘젠더 리서치 텔러’ 활동도 저의 이런 내력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활동은 대학생들이 정책을 제안하고 짧을 글을 쓰는 활동인데, 특히 구체적인 통계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더 도움이 많이 됐어요. 막연하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자료를 접했기 때문이죠. 그 활동의 목적은 통계를 활용해서 정책 제안을 하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이었는데 당시 제가 친구와 같이 했던 주제는 ‘농촌 여성의 재산권 문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통계를 살펴보니 농촌 여성들은 가진 건 없는데 일은 또 가사노동까지 이중으로 정말 많이 하더라고요. 그런데 집이며 농기계며 밭 같은 모든 재산이 거의 남편 이름으로 되어 있고 대부분 여성 이름으로는 소득이 잡혀있지 않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막연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구체적으로 마주할 수 있었죠. 그리고 20대 여성 중에 신변의 문제로 노동을 중단하는 여성의 수도 굉장히 많았던 기억이 나요. 그 때 활용했던 한국 여성 정책 연구원에서 제공하는 ‘성인지 통계’는 누구나 볼 수 있어요. 보면 굉장히 세세하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어서 보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말 그대로 성별을 인지한 통계이고, 일반 통계자료가 차이를 지워버린다면 이건 성별이나 연령간의 차이에 구별을 해 놓은 거죠.
Q.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계간홀로>에 대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2013년부터 발행하고 계시는 잡지 <계간홀로>는 ‘전방위. 무정형. 비연애인구 전용잡지’ 라는 테마를 갖고 있는데요. 이런 새로운 시각의 잡지를 창간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생각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계간홀로>를 출간하고 난 후에, 종종 ‘나도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라고 하시던 분들을 보면서 이를 많이 느꼈어요. 저는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모아서 어떤 기록을 만들고 담론의 장을 만들고 싶었죠. 생각은 20대 초반부터 했었는데, 그렇게만 하면 그냥 개인적인 생각으로만 머물고 사라질 것 같았습니다. 이를 하나의 흐름, 이야기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후 그걸 어떤 매체를 통해서 실현시켜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제가 웹 친화적인 사람도 아니고, 전공 특성상 손에 잡히는 책 즉, 잡지로 만들고 싶었어요. ‘과연 책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당시에 독립잡지 붐이 일기 시작해서 많이 참고 할 수 있었고, 전문적이지는 않더라도 계획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막상 시작을 하니, 책 출판이 생각보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좀 더 유의미한 대화의 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어요. <계간홀로>에 담게 될 내용이 아무리 세상에 ‘한 줌’이라고 해도, 다 흩어져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죠. 결코 무기력하게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라도 이런 생각을 한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리려고, 없었던 이야기로는 두고 싶지 않았어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고나서 실천을 해보자고 결심한 것이죠. 그리고 작년에는 제 잡지를 본 출판사의 권유로 『연애하지 않을 자유(21세기 북스)』라는 책도 출판했어요. 제가 만약 다른 전공이었다면, 잡지가 아니라 영화 혹은 사진으로라도 비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Q. 추가적으로, 그런 잡지에 대한 구상을 20대 초반 때부터 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비연애’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대 초반엔 저도 연애의 장에 끼려고 굉장히 노력을 했었는데요, 저 역시도 연애가 정상성의 표지로 생각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사회에서는 인기가 많은 것, 여성의 경우엔 주로 남성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통과의례죠. 즉 연애가 사회에서 개개인의 쓸모를 시험받는 통과의례가 되어버렸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그 과정에서 제가 느낀 것은 자기 자신의 특성이 연애에 적합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취급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제 이야기로 말하자면, 제 어조, 말하는 태도 등 이런 것들에 대해 학교에서 발표할 때와 미팅·소개팅에 나갔을 때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어요. 즉 제 특성이 연애를 위해 나간 장소에서 마이너스 요인이었으며, 주변인들로부터 이를 ‘고쳐야한다’는 말을 들었죠. 그렇다면 연애에 적합하지 않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는 특성들은 다 축출하고, 교정하고, 개선해서 이성적이라고 주입되는 소위 ‘여자여자한’ 것에 맞춰야 하나? 라는 의문점이 생기게 됩니다. 또 소위 ‘여자여자’의 표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도 분명 여성스럽지 않은 면모가 있을 것인데, 사람들이 그런 점을 외면하는 건 아닐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고요. 캐릭터화된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닌데,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을 캐릭터로 밋밋하게 만드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사례를 떠올려 보더라도 우리는 타인에게서 관찰되는 모든 것을 쉽게 연애와 연관 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예요. 그런데 이 요구들이 만약, 나에게 안 맞고, 내가 싫어하고, 나에게 안 어울리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연애’에 최적화된 사람이 되기 위해 저를 깎아내서 교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연애만이 인생의 풍요로운 경험이나 순간들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도 믿지 않았고요. 그러나 우리 사회에선 연애를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 감정의 희로애락을 다 체험할 수 있고, 예술 작품에 나오는 감정 선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모임을 나가도 종종 연애 중인 사람/아닌 사람들을 우열의 개념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하지만 우리 주변만 보더라도, 소위 ‘우월하고 완벽한’ 사람만이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현상들을 목격하면서 실제적인 표본과 흔히 매체를 통해 주입되는 것과의 괴리가 굉장히 크다고 느꼈습니다.
제 안에서 이러한 생각들이 충돌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쯤에는 아예 연애 보이콧을 한 적도 있었는데요. 일종의 기한 한정적 비연애주의자가 되었던 것이죠. 그러다 한 1년 정도 후에, 연애를 거부하는 것으로는 너무 한정적 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연애대상으로 인정받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연애가 얼마나 우리를 옭아매고, 어떤 사람과 사귄다는 표식이 그 사람의 자아정체감 형성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무작정 절대 하면 안 된다고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같이 이야기 해보고 잠깐의 단절 혹은 머뭇거림을 같이 도출해보고 싶어졌어요. 그러면 조금이라도 보이는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현상을 철저히 제 삶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특성임을 인정하고, 정확히 무엇인지 들여다보자고 결심 했습니다.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연애를 위한 연애’를 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고자 했고 연애에는 무엇이 있기에 그렇게 강조하고 스스로를 억압하는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역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생각이 바뀌어 왔고, 물론 지금도 그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아마 2-3년 뒤에 지금 인터뷰 하는 내용과는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겠죠. (웃음)
Q. 세상에는 누구든지 누려야 마땅한 많은 자유가 있습니다. 특별히 그중에서도 ‘연애하지 않을 자유’를 주제로 한 잡지를 시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전 질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저 역시 연애 적령기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마땅히 좋은 것이라고 표상되는 무언가에 대해 그것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면, 다시 말해 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면 저는 그건 자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연애고요. ‘그래도 연애를 하면 좋다’는 이야기는 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애가 마땅히 좋은 것, 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현상에서 탈피하자’는 의견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런 식의 부드러운 포섭은 우리를 저항하기 힘들게 만들고, 이것이 억압이나 착취라는 사실을 숨겨버립니다. 마치 열정페이와 비슷한 맥락이죠. 나에게는 열정적이지 않을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청년은 무조건 열정적이어야만 해! 라고 사회에서 강요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연애를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함과 동시에 좀 더 다양하고 비가시화 되었던 이야기 역시 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연애(사회가 허용하는 연애 ex. 이성애)를 해도 되고, 어떤 사람은 연애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경우도 <계간홀로>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즉, 어떤 연애가 해야 하는 연애고 하면 안 되는 연애인지, 그 감춰지는 연애들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 부분에 대해서도 담론의 장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편집장인 제가 결혼적령기에 들어갔기 때문에, 앞으로는 결혼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더 자주 하게 되겠지요.
Q. 계간홀로에서는 ‘짐송’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시는데 어떤 이유나 뜻이 있나요? 또 ‘솔로’와 ‘애인’대신, ‘홀로’와 ‘짝꿍’이라는 표현도 신선한데요.
‘짐송’은 독일에 갔을 때, 은행에서 제 이름을 오타를 낸 것에서 시작된 이름인데요. 제가 느끼기에 연령을 비롯한 조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나를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인들이 제 실명을 부를 때와 그 오타 나서 만들어진 이름을 부를 때와 차이가 있었거든요. 이 이름이 ‘언니, -씨, -님’ 과 같은 복잡한 호칭문제를 해결해주고, 사람들이 편하게 저를 짐송이라고 불러주는 것이 좋았어요. 앞으로도 사람들이 자주 이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짐송’이라는 이름이 무척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지인들은 드센 느낌이라고 말하더라고요. (웃음)
‘짝꿍’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커플’이라는 표현, 특히 ‘남친, 여친’ 이라는 말이 너무 이성애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성별을 지운 표현을 쓰자는 취지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잡지의 이름이기도 한 ‘홀로’는 ‘솔로, 싱글’을 가리키는 우리말이 없어서, 인위적으로 만든 것인데요. 한 편으로는 ‘이름 없음’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구도 있죠. 즉 어떤 현상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그 부분이 사회에서 가려져있고, 그 상태의 지속성을 인정 못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면 이제 그 현상을 다루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혹은 갖게 되었다는 의미니까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비혼(非婚)’ 이라는 말이 없었는데 최근에는 많이 쓰이는 것처럼 말이죠. 보통 연애를 안 하고 있는 상태 즉 솔로는 탈출해야하는 감옥 혹은 지옥이라고 표상되는 것에 반대해서, 이 말과 비슷한 ‘홀로’를 생각해냈습니다. 부사를 명사로 표현을 하니 처음 들었을 때 사람들이 낯설어 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어요. 비연애도 역시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이고요. 낯설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의문을 갖고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죠.
Q. <계간홀로>가 지난달 창간 4주년이자 열 번째 발행호가 나왔습니다. 텀블벅에서 진행된 10호 출판 모금에서는 역대 최다 금액인 목표액의 634%를 달성했는데요! 이렇게 <계간홀로>가 날이 갈수록 화제를 모으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이제 사회에서 조금씩 ‘연애(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연애 포함), 비혼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또한 사회에서 표면적으로 퀴어에 대한 주제를 잘 다루지 않고 무시하기에, 이야기를 시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다고 생각합니다. 연애칼럼을 싣는 패션지에서도 퀴어들의 연애같이 ‘성정체성에 자체에 소수성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다루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계간홀로>가 당사자들이 좀 더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매체임과 동시에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이들 역시 많아졌기에 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에도 이번 호 만큼의 결과를 얻을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이제 이만큼 사람들이 믿고 후원을 해주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더 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낸 공신 중 하나가 ‘물티슈’ 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전도용 물티슈를 주문해서 스티커 부분에만 계간홀로 홍보 문구를 넣었는데 SNS에 올리자 사람들의 반응이 좋더라고요. 결과적으로 후원자 수도 올라갔죠.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