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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 육군사관학교 최초의 민간인·여성 교수 정성임(정치외교, 85년 졸)

  • 등록일201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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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육군사관학교 민간인 교수

지난 7월 1일 육군사관학교는 1946년 개교 이래 처음으로 민간인을 교수로 임용했다. 정성임 전 이화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정외·85년 졸)이 그 주인공. 정 동문은 정치외교학과 81학번으로 이화여대에서 석·박사를 모두 거친 순수 국내파 학자다.

10여 년 전부터 민간인 교수를 영입하려던 육사는 그동안 적임자를 찾지 못하다 이번에 정 동문을 임용함으로써 최초로 군인신분이 아닌 학자를 전임교수로 맞았다. 여성 전임교수도 정 동문이 최초다. 정 동문은 이번에 신설된 ‘군무원(4급) 교수’ 신분으로 안보관리학과에서 생도들을 가르칠 예정이다.

장마가 잠시 쉬어간 8일 오후 서울 공릉동의 화랑대(육사) 연구실에서 정성임 교수를 만났다. 차분한 잔꽃무늬 원피스 차림으로 나타난 정 동문은 캠퍼스에서 유일하게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었다.

“꾸준히 한 길 걷고, 학생들과 교감”

- 육사 최초의 민간인 교수가 된 소감은?

운이 좋았다. 민간인 초빙을 위해 육사가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왔고, 여건이 성숙된 시기에 정치학 전공으로 티오가 나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은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다. 안보 분야를 지망하는 이화의 후배들에게 ‘파이팅’을 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

- 해외 학위를 선호하는 풍토에서 국내 박사로 교수가 됐다.

꾸준히 한 길을 걸으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이 도움이 됐다. 구 소련의 북한점령정책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나서 안보분야로 공부가 심화됐고, 그러면서 국방부와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같은 경력도 쌓을 수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관련 분야 실무를 경험하는 게 공부의 깊이도 더해주더라.

박사 논문을 쓸 때는 미국 미들베리 칼리지에 있는 러시안 스쿨에서 러시아를 배우고, 러시아과학원 동양학연구소 초청연구원으로 체류하면서 현지 자료들도 모두 구해서 보았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임한 것이 국내 박사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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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육사도 일반 대학 교수채용과 비슷한 절차를 거치는데, 강의 경험이 많은 게 이번 전형 과정 중 연구강의에서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99년부터 이화를 비롯해서 서강대, 서울대 등에서 강의했고 육사 강의도 2002년부터 10년째다. 보통 다른 대학 교수채용에서는 연구강의를 길어도 20-30분 하는데, 육사에서는 50분이나 했다. 심사하는 교수님들 앞에서 수업 하나를 통째로 한 셈이다. 

- 2002년에 이화에서 ‘강의우수 시간강사’로 뽑힌 적도 있다. 특별한 교수법이 있나?

모든 교수님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항상 어떻게 하면 학생들을 잘 이해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수업에 들어가면 무조건 이름과 얼굴은 외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두 번째 만나면 반드시 학생이름을 불러준다. 교수가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결국은 학생들과 인간관계를 맺는 거니까 가능한 많이 관심 갖고 얘기를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리가 되서 학생에게 기회를 주거나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시도도 자주 하는 편이다.

“선생님, ‘쉬어’ 구령을 붙여주세요”   

- 육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학교 정외과 사무실로 육사에서 북한학 강의 의뢰가 들어왔는데 당시 박준영 교수님이 나를 추천하셨다. 처음엔 망설였다. 군 경험이 없는 내가 생도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규율이 엄격해서 강의할 때 제약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서 사양했더니 당시 학과장님이 ‘한 학기만 해봐라’ 권유하셨다. 그렇게 시작한 게 오늘까지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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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겪어본 육사는 어떤 곳인가?

처음에 수업에 들어갔더니 생도들이 책상에 4열종대로 줄을 맞춰서 앉아있었다. 그러더니 오른쪽 맨 앞에 있던 생도가 일어서서는 나에게 ‘충성’하며 거수경례를 하는 거다. 나도 모르게 같이 경례를 해버렸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재 어떤 수업이고, 총원이 몇 명, 현재인원이 몇 명인지 보고하더라. 끝날 때도 마찬가지다. 마침보고를 받고 교실을 나가려는데, 교반장이 계속 경례를 하고 있는 거다. 이상해서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이 친구가 조그만 목소리로 하는 말이 “선생님, 그냥 ‘쉬어’(구령)를 해주시면 됩니다.”였다. (웃음) 

생도들은 군인과 학생으로서의 정체성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 대학생들과는 분위기나 문화에 차이가 있다. 시험도 ‘명예시험’이라고 해서 생도들 스스로 문제지를 배부하고 통제하는 일종의 무감독시험을 본다. 처음엔 낯설고, 생도들 웃음코드도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다. 기본적으로 육사의 생도들과 교수님들은 절제와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명예를 중시하고 매사 성실한 그들에게 내가 배우는 점이 많다.

- 생도들과는 어떻게 친해졌나?

그동안은 전임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지도생도가 없었다. 대신 국방학술부라고 일반 학교의 동아리 같은 성격의 모임에서 지도 강사를 맡으면서 생도들과 친해졌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상담도 해준다. 특수한 조직이지만 그 나이 또래의 청년들이 가진 연애문제, 학업, 교우관계에 대한 일상의 고민을 그들도 가지고 있다.
 

여기 교수님들은 다 중령, 대령이라 아직 임관도 안 한 어린 생도들에겐 어려울 수 있다. 게다가 생도시절부터 줄곧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해야 교수가 될 수 있으니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아닌가. 첫 민간인, 여자 선생님인 나에게 생도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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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 새로 1학년이 들어오면 지도생도를 배정받을 것이고, 당장 2학기부터는 안보관리학과에서 내가 속해 있는 국제관계학과의 4학년 생도들의 논문지도를 맡는다. 가을에 전국대학생안보토론대회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 나가는 생도들도 지도한다. 전보다 더 자주 가깝게 생도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 육사에서의 생활이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나?

육사는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준 곳이다. 그 전에는 박사 학위 쓰면서 구 소련과 북한관계, 북한 정치외교 분야를 주로 연구했는데 이곳에서 와서 안보 분야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점점 늘어났다. 북한 군, 러시아 군사력 이런 주제로도 논문 의뢰가 들어오더라. 그런 부분을 새로 찾아가면서 공부하는데 이렇게 분야를 넓혀가는 게 원래 전공공부에도 시너지를 줬다.

박사라는 걸 흔히 학문의 정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오히려 반대가 아닐까. 산으로 비유하자면 ‘이제 너 혼자 공부를 시작해도 좋다’고 하산시키는 게 박사라고 생각한다. 진짜 내 공부는 박사 이후에 하는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시도를 통해 분야를 넓혀가는 것도 필요하고. 이런 점에서 육사에서의 작업이 내 학문적인 성장에도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안보분야의 여성 전문가가 된다는 것

- 여성 진출이 활발하지 않은 통일·안보분야를 진로로 택한 이유는?

난 원래 꿈이 발레리나였다. 실제 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발레를 했었고. 나중에 인대를 다치고 아버지도 반대하셔서 꿈이 좌절되면서 대학은 큰 목표의식 없이 왔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이 되었는데 미래가 걱정됐다. 지금보다 여성 핸디캡이 심하던 시절이었는데 능력만 있으면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직업이 뭘까 생각하다 전문가, 그 중에서도 학자의 길을 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정치학도로서 내 관심사는 주로 분단 상황과 우리나라 주변의 네 강대국에 있었다. 특히 냉전시대 구 소련이라는 나라의 시선이나 행보에 대해 흥미를 느끼면서 석사, 박사학위 논문을 모두 구 소련과 관계된 걸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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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우연도 많이 작용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나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마침 한국국제관계연구소에서 제의가 들어와서 연구원으로 일했는데, 당시 그 연구소가 굉장히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구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과 수교하는 데 일종의 가교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러시아 동양학 연구소와도 연락하고 그게 인연이 되어 나중에 초청연구원으로도 갈 수 있었던 거다. 이후 구 소련에서 북한, 북한에서 안보로 관심사가 확장되면서 이 분야에서 공부를 계속해오고 있다.

- 통일·안보분야에서 일하려는 여성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내가 여성이라서 이 공부를 해야 겠다’는 것보다 내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 먼저 생각하는 게 좋다. 관심을 둔 분야가 하필 남자가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겁먹을 필요도 없다. 열심히 공부하고 한 길을 걸어서 내공이 쌓이면 기회는 언제든 열려있다.

물론 사회 어느 분야처럼 핸디캡은 있다. 예를 들어 나 같은 경우 군은 참 알기 어려웠다. 군사정보는 민간인에게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어서 군인들만큼 시스템적으로 가가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시선을 바꿔보면 오히려 군 밖에 있어서 더 총체적인 시야를 가지거나 다른 아이디어와 시각을 제공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학자가 아니더라도 이 분야에서 일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군은 생각보다 남녀가 굉장히 평등한 조직이다. 기갑이나 포병 같은 특정 병과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분야가 여성에게 열려있고 진급 같은 경우도 남성은 남성대로, 여성은 여성대로 따로 경쟁을 한다. 아직 이 분야 여성 진출이 걸음마단계라 풀이 적지만 앞으로 충분히 늘릴 수 있는 여지가 크다고 본다. 

자기계발에 대한 지원도 확실해서 본인이 의지만 있으면 위탁교육을 통해 국내외 석사, 박사를 취득한 기회를 준다. 꼭 부모님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자기만 열심히만 하면 국가의 지원을 받고 공부할 수 있다. 안보분야는 학문 뿐 아니라 상당히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더 적극적으로 검색을 하고 경력을 쌓으면 많은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길 바란다.

똑 부러지기보다 조화로운 이화인이 되길

- 이화에서 모든 학위과정을 마쳤고, 통일학연구원에서도 일했다. 공부환경을 평가한다면?

 

북한학이나 통일·안보분야 연구에서 이화의 경쟁력은 잘 알려져 있다. 난 정치학 대학원에서 주로 공부를 했고 북한학 협동과정에서 공부한 게 아니라 체감환경을 말하기엔 어려움이 있지만, 통일학연구원 자체가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석·박사과정 연구자들에게 참여할 기회를 많이 주는 걸로 알고 있다. 다른 학교에서는 갖기 어려운 장점이다. 또 이화는 전통적으로 사회학이나 교육학, 여성학 분야에 강점을 가진 학교라 북한의 사회문화, 교육, 여성 쪽으로 공부해보는 것도 괜찮다.  

 

- 이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 

이화 출신이라는 게 사회에 나가보면 큰 자산이다. ‘예전에 이화인과 같이 일 해봤는데 유능해서 좋았다’와 같은 신뢰나 평판이 널리 공유돼 있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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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선배로서 조언을 한다면 살다보니 ‘똑똑하다’이 말이 꼭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똑똑하기만 하면 부러지기 쉽다. 현명하게 밀고 당기기를 잘 하면서 상황에 따라 유연성을 발휘하는 게 중요하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든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또 한 가지는 시야를 넓게 보고 꾸준히 자기 길을 가라는 것. 어느 조직의 일원으로 있다 보면 자기 일이 시시해 보이고 자기가 꿈꿔왔던 직업적인 이상과 갭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때 대책 없이 튀어나가기 보다 인내심을 가지고 두고 볼 필요가 있다. 불합리한 상황에 직면해서도 내가 나중에 저 위치에 가면 저렇게는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반면교사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화인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한계에 도전하고 가끔은 깨지기도 하면서 커나갔으면 한다. 파이팅이다!

 

│글·편집 이화여대 홍보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