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계] 이영희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사회·62졸) N
- 등록일2025.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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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 산조 및 병창 보유자 이영희 동문(사회 62졸)이 2025 '자랑스러운 이화인'에 선정되었습니다. 지난 60여 년간 한평생을 바쳐 국악 예술 발전과 전통 문화 전수에 기여해 온 이영희 동문의 이야기를 만나봅니다.
Q. 자랑스러운 이화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1962년 2월 졸업식 이후 63년 만에 처음으로 대강당 무대에 서서 자랑스러운 이화인상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나를 키워준 모교와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들어, 앞으로 남은 생에는 모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귀한 상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Q. 선생님은 어린 시절부터 국악과 인연을 맺어오셨는데,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193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전국의 쌀이 모두 집결하는 항구 도시라 부유한 편이었던 군산은 마을에 집집마다 풍류와 함께하는 잔치가 많았어요. 잔칫날이 되면 저는 하루 종일 신이 나서 소리와 춤을 따라했습니다. 또 명절이 되면 풍장꾼들이 줄지어 북과 꽹과리를 치며 동네를 누볐는데, 저는 하루 종일 그들 뒤를 따라다니며 소리를 흉내 내고 놀던 아이였죠. 어려서부터 소리와 춤, 악기에 모두 관심이 많았어요.
중학교 때 군산의 명기였던 김향초 선생님이 승무를 가르친다고 하니, 친구들이 배우러 간다기에 저도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가 참 깨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직접 장삼을 만들어주시며 '배우고 싶으면 배우라'고 허락해주셨죠. 아마 그때부터 저의 국악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아요. 그 후 군산의 풍류객 이덕열 선생님께 가야금, 단소, 양금을 배우며 음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그 덕분에 예인들의 삶과 예술에 자연스럽게 젖을 수 있었어요.
Q. 대학은 국악이 아닌 사회학과에 진학하셨는데, 이화에서의 대학생활은 어떠셨는지요?
그때는 국악과를 찾기 어려운 시대였어요(본교 국악과 1974년 신설). 1958년에 이화여대 사회학과에 먼저 진학했지만, 가야금을 계속 배우고 싶었거든요. 수소문 끝에 국립국악원 사범이던 김윤덕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서 가야금산조와 거문고를 사사했습니다.
처음에 입학해서는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진선미관 있죠? 선관 206호가 제 방이었어요. 학교 끝나고 바로 가야금 수업을 받고 돌아오면 기숙사 저녁 시간이 훌쩍 넘어서 저녁을 굶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과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어요. 매일 가야금을 배우러 가야 되니까 소풍도 안 가고, 그래서 과에는 친구가 별로 없었어요.
그래도 예경회 활동 덕분에 지금까지 소중하게 이어지는 이화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당시에 문리대 이헌구 학장님을 중심으로 공연, 연극, 합창을 할 수 있는 학생들과 각 학과의 대표 학생들이 모인 예경회가 조직됐어요. 미네소타 입양아의 대모 심현숙, 무용가 이복형을 비롯해 장명수 이화학당 이사장 등이 함께 활동했습니다. 저에게는 어린 시절 군산에 피난 와서 많은 추억을 공유한 이혜성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이화여대에 와서 다시 만나게 됐고, 훗날 같은 직장에서 또 만나게 된 기막힌 인연이었죠. 이혜성이 수학과에 다녔던 덕분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장상 전 총장과도 함께 어울려 지내기도 했습니다.
Q. 대학 졸업 후 곧바로 국악예술학교(현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교사가 되어 약 20년을 봉직한 시간을 '행복한 세월'이라고 하셨는데요.
4학년 2학기 때 중앙방송이 주최하는 콩쿨에 나가서 대상을 탔어요. 그때 심사위원으로 오신 국악예술학교 박헌봉 교장선생님이 저를 눈여겨 보시고, 졸업 후에 선생으로 오라고 제의를 하셨죠. 학교에 와보니 친구 이혜성이 먼저 수학 선생으로 와 있었어요. 저는 당시 국악인들 사이에서 흔치 않게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국악뿐 아니라 국어도 가르쳤어요. 그 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 김윤덕·성금연 선생님(가야금), 한영숙 선생님(무용), 지영희 선생님(해금), 박귀희 선생님(판소리) 같은 명인·명창 50여 명이 함께 근무했거든요. 이러한 쟁쟁한 분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 평생에 굉장한 자산이 되었어요.
Q. 이후에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서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요?
아까도 언급했지만 이화 학창시절 친구였던 심현숙이 제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소식을 듣고 뜻있는 일을 함께 해보자고 제안을 했어요. 해외 입양아들을 위한 국악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입양아들이 문화적 뿌리를 되찾고 자긍심을 얻을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친구 심현숙을 잠깐 소개하자면, 1.4후퇴 피난길에 어린 동생을 길에서 잃어버릴 뻔한 경험과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발생한 현실을 겪고 고아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기로 작정하고 이화여대 사회사업과에 들어온 친구였어요. 한국기독교양자회, 홀트아동복지회에서 고아들에게 부모와 가족을 연결하는 일을 하다가, 우리가 해외로 보낸 아이들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으로 미네소타로 이주해서 해외입양아들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 친구와 제가 문화관광부(現 문화체육관광부)와 재정경제부(現 기획재정부)를 설득해서 사업을 승인받고 당시로서는 큰 금액인 2억 원을 지원받아서 미주, 유럽, 호주의 입양아들에게 우리 전통문화와 국악을 가르치는 사업을 10년간 지속했습니다.
한 번은 담뱃불로 온 몸에 상처를 입은 아이가 캠프에 왔는데, 끝날 무렵에 어머니가 와서 "우리 딸이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러줬다"고 감격하면서 감사 인사를 했어요. 또 오클라호마에서 만난 한 어머니는 "내가 입양한 아이의 나라가 이렇게 훌륭한 문화를 가진 걸 알게 돼서 너무 행복하다"면서 울더라고요. 제가 마음으로 함께 울었던,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네요.
Q. 최근에 200억 원 상당의 토지를 문화재청에 기부하셨고, 기부하신 토지에 국가예능전수교육관이 건립된다고 들었습니다.
제 삶의 마지막 정리라고 생각해요. 무형문화재 중에서도 음악과 무용 등 예능 부문 보유자들이 제대로 된 교육 공간이 참 부족했거든요.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은 기능 부문 보유자들이 주로 사용하고, 우리 예능 보유자들은 대개 집에서 전승 교육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아요. 노래, 춤, 연주는 소음 문제가 있으니까요.
우리 국악인들은 여름이면 '산 공부'를 해요. 한적한 산으로 들어가서 집중해서 연습하는 기간이에요. 제가 이곳 성남으로 이사한 것도 서울에서 가까우면서도 청계산 자락에 있어 여름 '산 공부'하기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운 좋게도 제 땅이 판교 제2테크노밸리 개발지로 수용돼서 토지보상비를 받았고, 그 돈으로 청계산 입구와 바로 맞닿아 있어 평소에 산을 오르내리며 눈여겨 보았던 지금의 집과 땅 1700여 평을 추가로 구입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값이 많이 올랐어요. 지금 거래가가 200억 원에 달한다고 해요.
문화재청에서 사업비 200억 원 정도를 추가로 투입해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예능전수교육관을 지을 예정입니다. 그토록 꿈꾸고 바랐던, 우리 후학들이 마음껏 배우고 즐기는 전승교육 공간이 마련되어 정말 보람되고 기쁩니다. 평생을 미혼으로 살며 휴지 한 장 허투루 안 쓰고 모은 재산이었지만, 쓸 곳에 썼으니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Q. 마지막으로 이화의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저는 이화여대에서 4년을 보내며 소중한 친구들을 만났고, 뜻 있는 일을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사회학과에 속해 있으면서도 국악이라는 저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이화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선생님들의 따뜻한 격려 덕분이었던 것 같아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아 끝까지 해보라는 것입니다. 저는 60여 년간 가야금 하나만 붙들고 살았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기쁨과 보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어요. 특히 이화의 후배들이라면 더욱 용기를 내어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길 바랍니다. 이화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시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