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방송계]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 <김현정의 뉴스쇼> CBS 김현정 PD(불문·00년 졸)
- 등록일2015.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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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7시 30분, 98.1MHz CBS 표준FM <김현정의 뉴스쇼(이하 뉴스쇼)>에서 세상을 깨우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2008년 첫 방송을 시작한 <뉴스쇼>는 수많은 청취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대표적인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했다. 2013년 포털사이트 ‘다음’ 종합검색어 순위의 라디오 분야에서 시사 프로그램 중 1위를 기록했으며, 청취율도 꾸준히 상승하여 지난 1년 새 59%가 증가했다. 청취율의 수치적 상승뿐 아니라 프로그램의 내적 완성도 역시 인정받아 지난 4월에는 한국PD대상에서 ‘올해의 PD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이화 출신 언론인들의 모임인 ‘이화 언론인클럽’에서도 역시 지난 4월 14일 ‘제14회 이화언론인상’ 수상자로 <뉴스쇼> 제작팀을 선정, <뉴스쇼>가 어디 내놔도 자랑스러운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음을 입증했다.
이화투데이가 <뉴스쇼>의 진행자이자 14년차 프로듀서 김현정 동문(불어불문·00년졸)을 목동 CBS 사옥에서 만났다.
우선 '이화언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PD대상에서 '올해의 PD상'도 수상하셨는데요, 소감이 어떠신지요?
이화에 훌륭한 선배님들이 많으신데 아직 연차가 적은 제가 타도 되는지 송구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정말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상을 받았지만, 그 중 이화 언론인상은 정말 특별한 것 같습니다. 제가 학교 방송국 EBS(현 EUBS) 활동을 오래 했었는데 그 때 배운 것들이 지금 하고 있는 방송생활의 바탕이 되고 있어요. 그만큼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던 이화에서 주는 상이기에 더욱 특별하고 감사했습니다. |
'올해의 PD상'도 마찬가지로 굉장히 감사한 상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시청률(청취율)로만 따지면 TV와 비교가 되지 않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상을 주셨다는 것에서 시청률을 떠나서 프로그램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동료 PD들이 선정한 상이기에 더욱 큰 의미가 있었죠. 또 한편으론 우리가 잘해서 준 상이기도 하지만 "사명을 다 해라", "더 잘해라"라는 의미로 주시는 상인 것 같아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화를 졸업하신 후 일간지에서 신문 기자로 일하다 CBS PD가 되셨고, 지금은 앵커로서 진행도 하십니다. 기자, PD, 앵커… 다양한 직군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계기들이 궁금합니다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 PD였어요, 한 번도 바뀐 적은 없었습니다. 학창시절에도 계속 PD 준비를 했었는데, 방송국에서 사람을 너무 안 뽑았어요. 그래서 2순위였던 기자 시험을 보고 신문사에 들어가게 된 거에요. 그렇게 1년 쯤 기자 생활을 하는데 마음속에 여전히 PD에 대한 꿈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연출이 하고 싶다', 'PD가 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기자직을 그만두고 신입으로CBS에 들어오게 됐습니다. CBS에 들어와서 즐겁게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음악 프로그램도 만들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2주 동안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목소리 톤이 '시사 프로그램'에 어울린다는 이유로 그 공석을 제가 맡게 되었죠. 그러다 쭉 9년째 하게 된 거예요. 즉 PD를 하게 된 건 저의 확고한 신념에 의한 것이었고 앵커를 하게 된 것은 굉장한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죠.
보통 시사 프로그램은 '4,50대 중년 남성'이 진행하는데, '30대 여성' 진행자로서 장점이나 노하우가 있다면요?
기존의 편견을 깬 시도가 큰 장점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 시사 프로그램을 많이 듣던 사람이 아니기에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아 단순하게 시작했어요. '나 같은 사람이 궁금해 할 것 같은,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에두르지 말고 쉬운 말로 질문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런 ‘평범한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거니까 잘난 척 하고 어려운 말을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죠. 그게 노하우라면 노하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처음엔 시사 프로를 30대 초반 여성이 진행한다고 주변에서 많이 걱정하셨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특징이 장점이 되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은 다른 시사 프로에서도 여성 진행자들이 늘어가고 있죠.
PD 겸 진행자로서 활동하시는 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두 가지 포지션을 가지고 활동하시는 것의 장단점이 있다면요?
프로그램 자체로만 봤을 땐 그냥 진행만 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큰 이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저는 PD, 작가들과 하루종일 같이 회의하고 함께 아이템을 선정하고 인터뷰이를 섭외하는 등 프로그램 제작 모든 과정을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지 역시 저만의 말로 재구성합니다. 함께 만들어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알고 있으니 프로그램 장악력도 높아지죠. 가수로 치면 '싱어 송 라이터(singer song-writer)'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노래를 받아 부르는 것과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직접 부르는 것은 다르겠죠. 저는 제가 ‘싱어 송 라이터’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점이 있다면,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죠. 하루 종일 프로그램을 함께 만드니까요.
<뉴스쇼>가 매일 아침 7시에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만큼, 스케줄도 만만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루 스케줄이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새벽 4시 쯤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핸드폰을 켜고 밤사이의 뉴스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뉴스쇼 트위터에 올라온 질문들을 읽습니다. 회사에는 5시 반 정도에 와서 오프닝, 클로징, 중간 멘트들을 직접 정리하고 원고를 써요. 그리고 아침 방송 뉴스들을 모니터하고 뉴스쇼를 7시부터 9시까지 진행하죠. 방송이 끝나고 난 뒤에는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는 기사 작업, 제목과 부제를 붙이고 포털 사이트에 송고를 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팟캐스트에 올리는 작업도 저희가 하는 작업이죠. 그런 작업을 끝내고 나면 10시 반쯤이 되는데요, 그 때야 비로소 아침을 먹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방송을 위한 회의를 시작하죠. 퇴근은 이르면 저녁 6시, 사건 사고가 많을 경우엔 8,9시에 합니다. 퇴근하고 저녁 뉴스를 챙겨보면 ‘방송인’으로서의 일과는 끝이 나고, 그 이후부턴 두 아이의 엄마로 돌아옵니다. 아이들 숙제 챙겨주고 목욕 시키고, 그러죠. 잠은 5시간 정도 자는 것 같아요.
<뉴스쇼>에서 접하게 되는 인터뷰이들이 굉장히 다양합니다. <뉴스쇼>만의 인터뷰이 선정 원칙이 있다면요?
저희의 원칙은 '당사자주의'입니다. 무엇이든, 제3자에게 가지 않고 사건의 '당사자'를 찾는 거죠. 가장 인상 깊었던 인터뷰가 뭐냐는 질문을 여러 번 받았는데요,그 때마다 말씀드리는 인터뷰가 있어요. 2012년에 군대 훈련소의 훈련병이 뇌수막염인데 뇌수막염인줄 모르고 군의무실에서 타이레놀을 먹다가 죽었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어요. 사실 이런 사고가 굉장히 많이 일어나는데, 그때마다 전문가 분들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죠. 그래서 저희는 참 어렵겠지만 '유족 분들에게 한 번 접촉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돌아가신 분의 아버님께 접촉했죠. 처음에는 굉장히 싫어하고 거부하셨어요. ‘이렇게 인터뷰를 한다고 뭐가 변하겠냐, 아들이 살아오겠냐’고 하셨죠. 그렇지만 저희는 상황을 설명드리고‘아버님이 한마디 말씀을 하시는 걸로 인해서 또 다른 피해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한번만 생각해보시고 아버님께서 하실 말씀이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말씀 드렸어요. 몇 번 연락을 드리면서 기다렸고, 일주일 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생방송 인터뷰에서 굉장히 담담하게 말씀을 이어가시는데 정말 슬펐어요. 저도 많이 울었고, PD, 엔지니어 할 것 없이 다 울었죠. |
청취자 문자도 정말 많이 들어왔는데 그 중에 어느 분은 너무 슬퍼서 운전을 못하겠다고 하시더군요. 포털 사이트에도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고, 여론이 움직였습니다. 며칠 후에 군에서 의료시스템 전면 재검토를 한다는 발표가 났고, 아버님이 전화를 주셨습니다. 너무 고맙다고, 당신을 설득해주셔서 너무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이 인터뷰가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인터뷰고, 이처럼 어떤 사건이든지 그 사건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당사자'를 섭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묻자는 거예요. 궁금해 하지 않는 이야기를 '궁금하시죠?'하면서 '이게 화제랍니다'라고 내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그 날 아침에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다보니 밤새동안 판이 갈리기도 하죠.인터뷰이를 정해놨는데, 새벽동안 다른 사건이 뜨거워졌으면 새벽에 나와서 판을 바꿉니다. 새 인터뷰이를 섭외하기도 하고 질문의 내용을 바꾸기도 하죠.
일반인을 인터뷰이로 섭외하는 작업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거절당하는 일도 잦을 것 같은데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해결해나가시나요?
많이 어렵죠. 거절 많이 당해요. 지금도 거절당하고 왔어요.(웃음) 그렇지만 언젠가는 마음을 열거라고 생각해요. 저희가 원할 때 나오진 않더라도 마음을 두드리는 작업을 계속 한다면, 당신이 마이크가 필요한 그 순간, 저희에게 연락을 하십니다. 예를 들어 2012년 오원춘 사건 때도 피해자 유족분들이 처음엔 인터뷰를 안 한다고 했지만 저희는 계속 문을 두드렸어요. 결국엔 억울해서 말을 하고 싶을 때 저희를 찾아주시더라구요. 그만큼의 신뢰가 쌓였으니까요. 일반인들한테는 거절도 많이 당하고 신뢰 쌓기까지 많은 시간과 힘이 들지만, 신뢰가 쌓이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듣고 나면 그 어떤 인터뷰보다도 훨씬 보람이 큽니다.
김현정 선배님은 속 시원한 '돌직구' 인터뷰로 유명하신데요, 인터뷰 시 원칙이나 노하우가 있다면요?
제 돌직구는 아픈 돌직구는 아니에요.(웃음) 저는 궁금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 아픈 돌직구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원칙은 한마디로 코가 간지러운데 볼을 긁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코가 간지러운데 이것저것 계산을 해서 볼을 긁고 있는 진행자들이 많아요. 에둘러서 가는 거죠. 코가 간지러우면 그냥 코를 긁어야 해요. 또 궁금한 것들을 본능적으로 질문합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제가 궁금한 게 사람들이 궁금한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질문의 깊이를 위해 공부도 많이 하죠. 방송 전날 하루 종일 제작 과정에 참여해서 내용을 많이 알고 있고,전날 연구하다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다 보고 안 되면 전문가한테 전화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공부는 기본으로 하되, 그 다음은 적시적소의 질문을 본능적으로 하는 거죠.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도 하셨는데요, 시사 프로그램 외에 좋아하시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음악 프로그램을 좋아해요. 제가 음악 프로그램 PD였기도 하고, 음악을 참 좋아해요. 출퇴근길에 93.9MHz, 저희 CBS 음악 방송이 좋아서 틀어놓고 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님께서 라디오를 사주셨는데 그때 음악 프로그램을 들으면서 라디오를 사랑하기 시작했거든요.옛날 가요 프로그램들을 들으면서 라디오 PD를 꿈꿨죠. 음악 중에서도 대중 가요를 좋아하는데요, 아무리 바빠도 요즘 음악과 관련된 흐름은 다 알고 있어요. 언제든 음악 프로그램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놓는 거죠.(웃음) 제가 음악을 좋아하고 그 외에 다양한 문화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저희 프로그램에서 다른 시사 프로그램과 달리 다양한 문화 인터뷰도 잘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게 된다면, tvN <응답하라 1994>와 같은 컨셉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요. 제가 95학번이라 딱 그 세대거든요. 3040세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을 가득 담은 그런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2003년 만든 다큐멘터리 <21세기 보육 백년지대계>로 남녀평등방송대상 최우수상과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 상을 받으셨는데요. 앞으로 또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신가요?
다큐멘터리는 정말 매력적인 장르에요. ‘큐!’가 들어가고 나면 DJ의 역량이 중요한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연출가의 시선이 들어간 프로그램이기 때문이죠. PD로서는 그 어떤 장르보다도 참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제가 2001년도에 입사했는데 2003년에 이 프로를 만들고 상을 받았어요. 그 후로는 시간이 없어서 한 편도 만들지 못했지만, 처음 입사해서는 일주일에 한편씩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사람들이 ‘쟤는 들어오자마자 다큐를 만든다’고 놀라기도 했어요.
사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대 방송국 활동할 때 쌓인 내공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이대 방송국에서 3년 동안 쌓은 경험들이 방송국에 들어와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활동할 때 정말 철저하게 모니터링을 했었거든요. 작품을 만들어와서 국원들이 둘러 앉아 같이 듣고 잘못된 점을 정말 혹독하게 지적했어요. 그리고 다시 고쳐오고, 그런 훈련을 매일 했었죠.
앞으로 또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다면 '여자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 중에서도 직장맘을 다룬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2003년에 보육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보육 백년지대계>를 만들 때 제가 결혼을 하기 전이었거든요. 결혼하고 엄마가 된 지금 다시 만든다면 그때 놓쳤던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아요.
본교 재학 중에는 어떤 학생이셨을지 궁금합니다. 학교 들어가자마자 학교 방송국(EBS)에 들어갔고 정말 열심히 방송국 생활을 했어요. 이대를 다닌거냐, 이대 방송국을 다닌거냐 할 정도였죠.(웃음) 제 학창시절의 2/3이 학교 방송국 생활이었고, 정말 후회 없을 정도로 열정을 다했어요. 그러다보니 퇴국을 하고나선 학점이 좋지 않아 고생을 좀 했어요. 방송국에 입사하려면 성적이 어느 정도 돼야 하니까, 3학년 2학기 때부터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A와 A+이 가득 찬 성적표를 받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어요. 그만큼 제가 하고 싶은 일도 열심히했고, 그 이후엔 공부도 열심히 했죠. |
학교 방송국 친구들과 축제 때 운동장에 동그랗게 앉아 맥주랑 새우깡 놓고 꿈을 이야기하던 추억도 있고, 밤새도록 방송 만들던 추억들이 있어요. 그 때는 방송 만든다고 부지기수로 밤을 샜어요. 젊음과 열정을 불태웠던 학창시절이었죠. 제 인생에서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하면 저는 언제나 주저 없이 대학시절이라고 이야기해요. 그때 함께 하던 학교 방송국 친구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고 종종 만나요.
선배님께서 이화에서 배운 것 중 사회에서 활동하시는 데 가장 크게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우리학교 출신들이 대부분 말하는 건데, "여성이라서 못할 것이 없다"는 걸 글로 배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 체득하는 거 같아요. 이를테면 남녀공학이라면 남자 대표가 해야 할 궂은 일, 전구를 갈거나 위험한 일에 앞장서는 것들을 우리는 스스로 당연히 하게 되는 거죠. 지금도 방송국에 이화 출신들이 여럿 있지만 여자라서 못한다거나 숨거나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우리가 늘 하던 궂은 일, 위험한 일들 그런 경험들이 참 소중한 재산이 됐어요. 저의 경우엔 "여성이라서 못할 일이 없다"는 걸 완전하게 체득을 하고 사회에 진출했고, 굉장한 자신감을 얻었죠.저 뿐만 아니라 제 이후에 방송국에 들어온 이화 후배들을 봐도 다 그래요. 남녀공학이 아니라서 대학 다닐 때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그걸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여대라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참 많아요.
언론인을 꿈꾸는 이화인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언론인이 되려면 참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 되려면 아직 우리나라에선 방송국이랑 신문사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 과정이 굉장히 험난할 거에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꿈을 놓지 말라'는 거예요. 제 주변을 보면 끝까지 꿈을 놓지 않은 친구들은 모두 언론인이 되어 있더라고요. 그런데 1,2년 공부하다 포기하고 그만 둔 친구들은 그 꿈을 항상 가슴 속에 가지고 살게 되고요. 한 친구는 4년간 준비를 하는데, 시험에 계속 떨어졌어요. 그런데도 계속 도전했고 결국에는 KBS에 들어갔죠.
결국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돼요. 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외에 영어라던가 상식 같은 건 정말 열심히 하다 보면 됩니다. '하다 보면 된다', '포기하지 마라' 그게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요즘 방송국, 신문사 취업하기가 너무 힘들어 포기하게 될 것 같은데,포기하면 정말 평생 미련이 남거든요. 그럼 참 안타깝죠.
이화를 졸업한 선배로서 이화인들, 대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저는 대학생들이 사회를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어떻게’가 아니라 그냥 바라보는 것 그 자체에 부호를 찍고 싶습니다. 가끔은 학생들이 사회를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아는 학생들 중에도 대학 입학하자마자 학점, 영어점수 관리하느라 책상 앞에만 앉아있는 친구들이 있어요. 물론 취직은 중요한 문제지만, 대학생 때 반드시 ‘대학생으로서 겪어야 하는 세상’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 어느 순간 특정 스펙트럼 이상을 볼 수 없는 한계가 생겨요. 그래서 그 때는 대학생 때 경험했던 것들을 되돌아봐야 하죠. 제 경우에도 이대 방송국 활동하면서 소외된 사람들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방송을 만들었거든요. 그 외에도 참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꼈어요. 대학생이니까, 대학생이었기에 볼 수 있었던 것들이었죠. 이런 내공들은 어느 직종에 가든, 어느 직업을 얻든 분명 큰 힘이 될 거에요.
‘경험을 위한 경험’을 하기 보단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언론사에 관심이 있다면 언론 관련 동아리라던지, 음악이 좋으면 음악 동아리라던지, 그 동아리에서 불우 청소년을 돕는 활동을 해도 좋구요, 즉 친구들이랑 뭔가를 꾸려보는 거에요. 영어 동아리도 좋아요. 영어 공부만 하지 말고 영어를 가지고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한다든지 하는 거요. 내가 배운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얼마든지 있어요. 이를테면 농활 같은 것도 정말 대학생 때밖에 못하는 경험이거든요. 저도 대학생 때 농활을 갔었는데, 비닐하우스에서 수박을 따던 그 때가 정말 더워서 그 경험이 굉장히 강하게 남아요. 그래서 지금도 농촌 뉴스가 나오면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20대가 되었으니 이제 다 큰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 그 때는 아직 감수성이 무척 풍부한 때에요. 그래서 그때 경험한 것들 하나하나가 평생 각인이 돼요. 그래서 그 내공들을 쌓기 위해 가리지 말고 닥치는 대로 경험해보길 바랍니다.
* 출처 : 이화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