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 진·선·미의 집
- Date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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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나의 모교 그리고 어머니
“어떻게 하면 언제 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모교 이화에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숙고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으로 늘 지지해 주셨던 부 모님을 어떻게 하면 인정해 드리고 알아드릴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제 고민의 일부였지요.” 윤여숙(사회 62졸) 동문은 2016년 이화 창립 130주년을 맞아 열린 해외동창 모교방문 행사에 참여하면서 신축기숙사건립기금 1억 원을 기부했다. 사랑하는 모교의 기숙사에 부친 윤석태, 모친 장길순, 동생 윤영자 동문(독문 68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기부였다. 특히 기부 결정에 가장 큰 계기가 된 분은 어머니였다. 교육의 힘을 알았고, 여성 리더십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 셨어요. 저를 비롯한 저의 모든 형제 자매들에게 각자의 기량 을 펼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를 주셨거든요.”
삶의 본보기가 되어준 두 스승
윤여숙 동문은 1967년,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이민 초창기 시절, 캐나다에서 두 번 째로 큰 통신회사의 기술 부서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기술 부서에서는 첫 번째 여성이었다. “저는 이 기회를 제 미래를 위한 좋은 사인으로 여기고 홀로 조용히 김활란 선생님과 김옥길 선생님 두 분께 감사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보기가 되어 주셨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롤모델 이 되어 주셨어요.”
그녀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정말로 최선을 다했던 세 번의 경험에 대해 들려주었다. “캐나다 소수민족 대표자연합회의 이사로 세 번의 임기를 봉사했어요. 45개의 소수민족 그룹을 대표하여 정부에 대해 다양한 주제에 조언자 역할을 했죠. 이민, 인권, 평등, 반테러주의, 반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인신매매 등이 저희가 다루었던 주제였어요.” 다소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는 주제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열심히 일했다. 그 이후에는 캐나다 연방정부 보건성과 함께 그녀의 다음번 도전이 시작되었다. “16명의 선출된 연방정부 보건성 자문위원회 중 한 명으로서 많은 보건 전문가들과 다양한 주제에 대해 논의했어요. 이러한 경험들을 거치며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어요. 제 앞에 한계란 없다는 느낌이었지요.”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 이화
마지막으로 윤여숙 동문은 캐나다 한인회 총연합회 최초의 여성 이사장으로 봉사한 경험 을 인생에서 ‘정말로’ 최선을 다했던 경험으로 꼽았다. 그녀는 다양한 직책을 맡아 최선을 다하는 결과를 맺기까지 ‘이화의 교육’에서 용기를 얻었다고 말한다. “1886년 스크랜튼 선생님이 오늘날까지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시작하셨다고 생각해요. 비전과 용기를 갖고 ‘여성도 세계적 수준의 교육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실천하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따라 저도 선생님이 시작한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어요. 또한 저의 꿈과 목표를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지요.” 이처럼 이화는 그녀에게 늘 살아있는 존재였다.
윤여숙 동문은 특히 진·선·미의 교육이념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진)을 우리 자신뿐 아니라 타인들을 위해서 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우리의 선함(선)으로, 주위를 보살피고 타인에 대해 동정심을 잃지 않았으면 해요. 마지막으로 서로의 다름에 대해 싸우기 보다는 우리의 다름을 기뻐하며, 사회에 조화(미)를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화의 학생들을 위한 짧은 기도로 인터뷰를 마쳤다. “이화의 학생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삶이 경이와 기쁨, 꿈과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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