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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굿네이버스 미래재단 이사장 김인희 동문을 만나다

  • 등록일2021.07.09
  • 3919

이화투데이는 이화DNA 인터뷰를 통해 사회 각 분야에서 최초와 최고의 도전을 이어가고 있는 빛나는 이화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요. 오늘 이화투데이가 만나고 온 자랑스러운 이화인은 굿네이버스 부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굿네이버스 미래재단 이사장으로 활동 중이신 김인희 동문(영어영문·80년졸)입니다. 희망편지쓰기, 희망학교 등의 프로젝트로 익숙한 굿네이버스는 1991년 한국에서 설립되어 전문사회복지사업과 국제개발협력을 활발히 수행하고 있는 글로벌 아동권리 전문 NGO입니다. 김인희 동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화와의 특별한 인연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세상을 위한 좋은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는 김인희 동문 님의 이야기, 바로 시작합니다.


김인희 동문

Q. 안녕하세요, 동문님. 이화인들에게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1976년 3월 문리대학 인문사회계열 로 입학하여 1982년 2월에 영어영문학과(부전공 도서관학과)를 졸업했어요. 대학을 졸업한 지 41년이 넘어 이화인들께 인사하게 되니 오래전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감회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저는 창립 때부터 2018년까지 글로벌 아동권리 전문 NGO 굿네이버스에서 재직하며 부회장으로 정년 퇴임한 후 현재는 굿네이버스 미래재단의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Q. 부회장직을 맡으셨던 NGO 굿네이버스에 대해서도 소개 부탁드립니다.

굿네이버스는 1991년 ‘한국이웃사랑회’로 시작되어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았어요. 창립 이후, 국내·외에서 전문사회복지사업과 국제개발협력사업을 활발히 실행하며 ‘굶주림 없는 세상,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미션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설립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NGO가 외국 원조 기관의 연장선에서 활동을 이어나간 것과는 달리 굿네이버스는 대한민국 토종 NGO로 시작해 30년 만에 명실상부 글로벌 NGO로 발돋움하였지요. 한편 굿네이버스는 1996년에 국내 NGO로서는 최초로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가 NGO에게 부여하는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지위’를 획득하였고, 이후 4년마다 기관의 활동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포괄적 협의지위를 유지하고 있고요. UN DPI/NGO 연례회의에도 참석하고 있지요. 2007년에는 유엔 새천년개발목표의 두 번째 목표인 ‘보편적 초등교육 달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새천년개발목표상(MDGs Award)을 수상하기도 했어요. 2011년에는 국내 NGO 최초로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의 공식 파트너 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답니다. 이 같은 공신력과 사업 전문성을 토대로 굿네이버스는 현재 글로벌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해외 47개국, 212개 사업장에서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사업을 수행하며 세상을 위한 좋은 변화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굿네이버스는 지난 30년 동안 전문 사회복지사업을 통해 국내 아동의 권리 증진에도 힘써 왔는데요. 1990년대 초, 아동학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무하던 상황에서 굿네이버스가 아동학대상담센터를 개소하여 국내 민간단체로서는 처음으로 학대피해아동을 위한 보호와 치료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아동학대 예방교육, 세미나 등을 통해 대국민 인식 개선에도 앞장서 왔고, 이 같은 노력은 2000년 아동복지법 개정이라는 결실로 이어지기도 했어요. 2015년부터는 굿네이버스가 국내 최초로 개발한 ‘아동보호 통합지원 전문서비스’를 바탕으로 학대 피해 아동뿐만 아니라 부모, 가족에게 전문적인 사례관리를 제공해 아동의 안전과 건강한 성장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한국에서의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글로벌 NGO로 재도약하기 위해 글로벌 정책 수립과 모금국 및 해외사업국 지원 기능을 맡는 글로벌 파트너십 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최근에는 미래 변화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산하 재단 설립을 통해 사업 전문성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데요. 해외사업국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 및 삶의 질 개선을 돕기 위해 2019년 굿네이버스 글로벌 임팩트 재단이 설립되었고, 2020년에는 초고령 사회에 시니어 세대를 중심으로 유산 기부를 통한 나눔과 봉사활동 등 새로운 나눔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굿네이버스 미래재단이 발족되었답니다.


Q. 굿네이버스(前 한국이웃사랑회) 창립 당시 창립 멤버 8명 중 6명이 이화 출신이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그중 5명이 영어영문학과 동창이시라고요. 어떤 계기로 모여 NGO 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한근흥(목사, 창립 당시 사업운영과장), 故 최지숙 동문(창립당시 회원관리과장), 이일하(사단법인 굿네이버스 인터내셔널 이사장, 창립 당시 사무총장), 김신순 동문(사단법인 굿네이버스 인터내셔널 고문, 창립 당시 총무부장), 김인희 동문(재단법인 굿네이버스 미래재단 이사장, 창립 당시 홍보과장), 정해원 동문(재단법인 굿네이버스 글로벌 임팩트 이사장, 창립 당시 회장), 故 정금선 동문(창립 당시 사업부장), 이호균 동문(사회복지법인 굿네이버스 이사장, 창립 당시 총무과장)


김신순(57학번), 정해원(61학번), 김인희(76학번), 故 정금선(66학번), 故 최지숙(71학번) 동문 이렇게 5명이 영어영문학과 동창이고, 이호균(70학번) 동문님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셨습니다. 저희 전공의 공통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국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업무가 필수였던 당시의 외원단체 세계기독교선명회(現 #월드비전)에서 선후배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해외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는데, 특히 외원단체의 외국 후원자들이 우리나라의 전쟁 과부와 고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 큰 힘이 되었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나라도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 나갔고, 1988년에 ’88 서울올림픽까지 개최할 정도가 되면서 해외 원조도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이에 외원단체도 국내에서 후원자를 모집하는 등 자원을 개발하며 자립 방안을 마련해야 했어요. 이렇게 국내에서의 자원 개발을 위해 애써오던 중, 아예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NGO를 설립하기로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는 단어가 있을 만큼 이웃 간의 정이 많은 우리 국민들의 동참을 유도해 국내의 어려운 이웃은 물론 빈곤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해외의 이웃들까지 도움으로써 우리나라가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하고자 저희 8명이 의기를 투합하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1991년 3월에 '한국이웃사랑회'(영문명 Good Neighbors)라는 이름으로 한국 토종의 순수 민간단체가 창립된 것입니다.



Q. 올해로 굿네이버스가 창립 30주년을 맞이했는데요. 긴 시간 활동을 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일이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굿네이버스는 한국에서 창립된 국제 NGO로 대한민국 서울에 국제본부가 있었기에 한국에 있는 직원들에게 국제회의 참석이나 해외 사업장 출장의 기회가 많았어요. 제 경우 국제개발협력 업무를 비교적 오랜 기간 담당하면서 굿네이버스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절대 가보지 못했을 나라들에 출장을 다녔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저에게 귀한 삶의 자산이 되어 있지요. 제가 갔던 30여 개국 중에 르완다,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북한 등을 가본 것이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게 가장 잊지 못할 출장은 2001년 9월 미국 뉴욕 UN 본부에서 있었던 국제회의에 참석했던 것입니다. 굿네이버스는 UN 경제사회이사회(#UNECOSOC)가 NGO에게 부여하는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 협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서 UN에서 개최하는 NGO 관련 회의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회의에서 국제 동향을 파악하기도 하고, UN에서 공표되는 발전목표에 따른 NGO 사업 활동 사례들을 공유하거나 바람직한 의제를 제안하기도 하지요. 당시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개최된 '제54차 유엔 공보국/NGO 연차 회의'에 굿네이버스를 대표해 저 혼자 출장을 갔는데, 공교롭게도 당시에 뉴욕 주재 굿네이버스 연락관이 공석 중이어서 저만 참석하게 됐어요. 9월 10일, 월요일 첫 회의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다음 날, 저는 둘째 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직행버스를 타고 숙소였던 뉴저지 친척 집을 출발해 뉴욕 맨해튼 UN 본부에 도착했어요.

바로 그날 9.11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UN 본부 로비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TV에 방영되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게 됐습니다. 회의 시간이 돼서도 자리가 많이 비었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이내 UN 본부도 테러 타겟 중 하나라며 모두 건물 밖으로 나가라는 비상 방송이 나왔습니다. 숙소로 돌아갈 요량으로 건물 밖으로 나왔는데 이미 모든 차량 운행이 중단된 상태였어요. 그래도 뉴저지로 가는 직행버스는 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버스터미널까지 걸어갔는데 터미널 역시 전면 봉쇄된 상태였습니다.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버스 운행이 재개될 수도 있으니 기다려 보라는 말에 근처에서 기다렸으나 봉쇄가 풀릴 기미조차 없었고, 결국 나갈 수 있는 방법은 허드슨강 부두로 가서 배를 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뉴욕 테러 피난민 신세가 된 것입니다. 더구나 내 나라도 아닌 낯선 이국 땅에서 말이죠. 행렬을 따라 우여곡절 끝에 배를 탔을 때 ‘이제 살았구나!’라며 한숨을 놓았습니다. 하지만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배가 다다라 탑승객들이 모두 내렸는데, 설상가상으로 또 하나의 난관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혹시나 또 다른 테러 공격 수단인 탄저균이 몸에 묻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온몸을 물로 닦아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탑승객들은 옷 입은 채로 한 사람씩 위에서 물을 뿜어대는 샤워 부스를 통과하고, 그 후에는 전면에서 소방 호스로 쏘아대는 물줄기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눠주는 대형 타월로 흠뻑 젖은 몸을 감싸고 나오니 의료진이 몸에 이상 여부를 체크했어요. 거기서 나눠준 에너지바 하나로 허기를 채우고 비상 운행 버스를 타고 뉴저지 시내 광장으로 가까스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국제선 비행기 운항이 재개되기까지 며칠을 더 지낸 후에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답니다.


지난 3월 굿네이버스 창립 30주년 및 굿네이버스 30년사 출판을 기념하여 창립멤버들과 함께. 고인이 된 정금선 동문님과 최지숙 동문님은 함께 하지 못했다.

(왼쪽부터) 김인희 동문, 김신순 동문, 정해원 동문, 이일하 이사장, 이호균 동문, 한근흥 목사


Q. 굿네이버스 창립과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고, 어떻게 이를 극복하실 수 있었나요?

1991년 당시에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모여 굿네이버스와 같은 사회복지 및 구호개발 NGO를 설립한다는 것은 그 뜻과 목적이 선하고 가치가 있었지만 리스크가 큰 모험이자 도전이었죠. 그래도 창립멤버들이 국제 NGO에서 일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원동력 삼아 마음을 합하고 힘을 모아 일할 수 있었어요. 아무래도 창립 이후 운영에서의 어려움은 계획된 대로 사업을 실행해나가기 위해 더 많은 분들이 굿네이버스 사업에 회원으로 동참하게 함으로써 사업 기금을 확보하는 데 있었어요. 특히, 1998년 한국이 IMF 구제금융 상황에 처했을 때 해외 사업을 해오던 굿네이버스도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었어요. 치솟은 달러 환율로 인해 해외 사업비 송금액은 반으로 줄게 되니 사업 진행하기가 어렵게 되었지요. 한시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고통을 함께 감내해 나가자고 이해를 구하며 그 시기를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Q. 동문님께서는 2020년 새로이 설립된 굿네이버스 미래재단의 이사장직을 맡고 계신데요. 굿네이버스 미래재단은 어떤 곳인가요?

우리나라는 2025년이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이에 굿네이버스는 미래의 환경 변화에 대응하고, 시니어 회원들과 그들의 나눔 활동 및 자원봉사 요구에 부응해 2020년 9월에 굿네이버스미래재단 재단법인을 출범하고, 시니어들이 건강하고 가치 있는 노년의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래재단은 시니어 주거복지사업, 봉사단 조직화 사업, 은퇴교육사업, 콘텐츠 홍보사업 등의 주요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요. 이를 통해 한국형 시니어 주거복지 모델 구현, 시니어 교육 및 복지 서비스 전문화, 시니어 사회공헌 및 봉사활동 네트워크 구축 등을 중장기적 과제로 계획하여 실현해나갈 예정입니다. 지난 6월 11일에는 '고령화 시대, 미래형 시니어 주거와 삶을 논하다'라는 주제로 2021 시니어 미래 포럼이 개최되어 성황리에 마쳤는데요. 굿네이버스 유튜브 채널을 통해 3시간 동안 생중계하여 287명이 사전 신청해 시청하여서 미래형 시니어 주거와 관련한 대중의 관심을 체감할 수 있었어요. 미래재단 설립 이후 첫 행사로 준비한 포럼이 시니어 주거의 새로운 서비스와 네트워크를 발전시키는 초석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Q. 창립 멤버 중 다섯 분이 영어영문학과 동창이시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인데요. 영어영문학과 재학 시절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제 소개에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인문사회계열로 입학하였고 3학년이 되면서 자율적으로 전공학과를 정하도록 돼 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영어영문학과로 학생들이 몰리게 되어 제 기억으로는 우리 영어영문학과 동기생이 250명이나 되었어요. 자연히 전공과목 수강 신청부터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치열했고요. 공부하는 것도 더욱 경쟁적으로 열심히 해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창립 멤버들과의 일화도 있습니다. 굿네이버스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로부터 협의지위를 받으려면 소정의 절차를 밟아 NGO 심의위원회 심사를 거친 후 최종 결정되어야 하는데요. 그 신청 서류 작성부터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죠. 유엔의 관련 부서로부터 받은 신청 가이드라인에 따라 창립멤버들이 회의를 하면서 먼저 우리 말로 서류를 꼼꼼히 작성하였어요. 그런 다음에 영문 번역 작업에 들어갔어요. 저희 창립멤버 동문들은 영문 번역 일을 한 경험이 있으므로, 신청 문서를 저희끼리 분배해서 영문으로 번역하고 취합하는 작업을 해낸 후 기한 내에 제출할 수 있었는데요. 우리 동문들이었기에 해낼 수 있었던 일로써 아주 뿌듯합니다.


Q. 그 시절 가장 그리운 장소나 추억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첫 수업이 오전 8시에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침에 도서관에 들렀다가 수업 시간에 맞춰 들어가곤 했는데요. 아침에 도서관에 가면 조용한 분위기에서 마음이 평온해져서 참 좋았어요. 무엇보다도 봄에는 도서관(현. 헬렌관)으로 올라가는 길가 목련나무에 핀 꽃들이 저를 반기는 것 같아 저도 꽃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며 지나갔지요. 가을에는 김활란 동상 주변에 푹신한 카펫처럼 노랗게 깔려 있는 은행나무 잎들 위에 앉아서 친구들과 도란도란 얘기하며 지냈던 것이 좋은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네요.


Q. 함께 하신 기간이 오랜 만큼 더욱 돈독하신 사이일 것 같습니다. 영문과와 영문과 동창회를 자랑해 주세요!

영문과는 다른 전공과에 비해서 영어에 큰 비중을 두어 공부하기 때문에 대학 졸업 후에도 폭넓게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를 더 한다거나 전문적으로 일하는 데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영어영문학과 동창회는 ‘영학회’로 불리며 활동을 하고 있는데, 영어영문학과 졸업생이면 자동 가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동창회 활동에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동창회의 특별한 활동으로 강사를 모시고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는 걸로 기억합니다. 좋은 기회인데도 저는 직장 일을 하다 보니 참석해보질 못해서 아쉽네요. 


Q. 이화와 영어영문학과에서 배우신 어떤 가치가 아동 권리 보호를 위해 힘을 모으게 했나요?

영어영문학과에서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을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영국 및 미국 문화에 대해서도 배울 수 있었는데요. 특히 영미권에서는 자녀 교육에 있어 자율성을 부여하면서도 잘못된 부분은 단호하게 훈육한다거나 아동들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이것이 아동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한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동문님께서 생각하시는 이화 DNA는 무엇인가요? 이화의 교육, 정신, 가치관이 동문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이화의 DNA는 이화의 교훈인 ‘진(眞), 선(善), 미(美)’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이화의 교훈을 다시 되새길 수 있어서 참 뿌듯하고 좋았습니다. 저는 미션스쿨인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합격함과 동시에 친한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가게 되었고 이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데요. 이화의 교육, 정신, 가치관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이 저변에 흐르고 있어서 제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고요. 제가 지금까지 여성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자유롭게 마음껏 하고자 하는 것들에 도전하며 살아가는데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이화의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대학 생활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됨을 명심하여서 무엇을 하든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 열과 성을 다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 이화투데이 리포터 12기 양희원, 함인영